Question:
최근 '호산장성(虎山長城)'이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확인되었다면서 중국 정부가 이를 알리는 각종 행사를 열었다고 하는데 이 호산장성은 어디이고, 우리 역사와 어떤 인연이 있는지요?
Answer:
고구려 관련성 지우고 복원된 '호산장성'
북한의 신의주에서 압록강 건너편은 현재 중국의 단동(丹東)이다. 단동은 과거 우리가 요동으로 들어가거나 중국에서 요동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쳤던 곳이기에 유서 깊은 역사유적이 제법 많다. 예를 들면 구련성(九連城)은 조선시대 한·중관계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다. 국경무역과 관련하여 교과서에서 배웠던 책문후시(柵門後市)의 책문도 단동의 북쪽에 작은 마을 변문(邊門)에서나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또 다른 지역 명소가 한 곳 있다. 바로 '호산장성(虎山長城)'이 그 곳이다.
호산장성은 우리가 각종 매체를 통해 익숙한 만리장성의 그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호산의 남쪽 아래에서 흙으로 다진 성벽의 토대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그 근거로 알려져 있다. 청나라시대의 지도에 현재의 위치에 '망우초(莽牛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의 시설이 들어서 있던 것은 알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장성인가의 여부는 산해관(山海關) 일대의 장성이 이곳까지 어떤 경로로 이어져 있었는가, 그 잔존 유적들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중국 측의 선언은 명대 만리장성이 서쪽의 가욕관( )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산해관에 이른다는 상식을 뒤엎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명은 당시의 요동(遼東)에 변장(邊墻)을 쌓았다. 아마도 이 변장이 만리장성의 길이를 늘이는데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는 듯하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이래, 장성은 중원왕조와 북방 유목세력 간의 경계를 표시하는 상징물이었다. 명은 그때까지의 장성을 연결하면서 현재 남아 있는 형태처럼 벽돌로 견고하게 장벽을 구축하였다. 명 역시 만리장성이 가지는 기능에 대해 별다른 변화를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달리, 요동의 변장은 흙을 다져올려 만든 토벽으로 이제까지 장성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는 않고 있었다.
'변장'을 장성에 포함시키는 중국의 숨은 의도
이 점에서 만리장성의 길이를 늘여 보려는 시도는 동북지방이 과거부터 중국의 일원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로써 만리장성은 장성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역사성과는 무관하게 명대 동북지방이 중국에 통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상징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장성의 실재 여부와는 별도로, 이 유적에 대한 설명은 역사적 유래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다. 중국 측은 이곳에서 장성의 흔적을 찾던 중, 고구려의 성벽도 발견하였다. 이 성은 박작성(泊灼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압록강을 거슬러 온 당나라군을 가로막았던 성으로 여러 차례 사서에 등장한다. 아마 '망우초' 역시 그 토대 위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가 당과 교류하던 시절, 당의 사신은 황해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이 있던 이 곳 하구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므로 이곳의 역사적 연원에서 고구려와 박작성에 대한 언급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지의 안내 설명문에서 관련 역사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복원된 역사유적과 박물관의 전시 설명은 그것 자체가 역사교육이다. 이처럼 과거의 역사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있는 역사교육이 과연 어떤 성과를 내게 될 것인지 적이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