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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역사학의 아버지는 지리학
  •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장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장

서양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헤로도투스(기원전 480~420)는 원래 그리스 사람이 아니다. '도리아'의 식민지 땅인 오늘 날 터어키의 보드룸에서 태어났다. 서른 살이 되는 해까지 세계를 두루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혔는데, 메소포타미아(이라크), 페니키아(레바논), 스키타이(우크라이나) 그리고 이집트를 여행하고 나서 그리스에 정착하여 '역사'(Historia)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책을 읽어보면 자기가 직접 본 것, 현지에서 들은 이야기 등이 두루 기록되어 있다.

스키타이 사람들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조그만 텐트에 여러 사람이 들어가 마리화나 같은 환각제를 마시는 이야기라든지, 동방에 살고 있는 종족에 '아르기 파이오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대머리라는 이야기는 직접 경험이나 전문에 의한 것인데 후대에 그런 내용들이 고고학 발굴로 증명되었다.

실제로 구 소련이 발굴한 스키타이 유물을 보면 작은 뿔잔 하나를 두 사람의 전사(戰士)가 함께 들고 머리를 맞댄 채 술을 마시는 금제 유물이 있어서 음주 환각 상태라는 것이 충분히 짐작된다. '역사'의 기록과 고고학 유물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알타이 산속에서 발굴된 직물 조각에 그려진 여러 샤먼의 모습은 모두 대머리였다. 이처럼 헤로도투스가 스키타이 지역을 방문하여 보고 들은 이야기가 사실로 증명된 것이다.

대머리 종족이 살고 있던 땅이 오늘 날 알타이 산 고원지대인 파지리크이다. 파지리크 유적이 보여준 스키타이 문화의 마지막 시기는 기원전 3세기까지이다. 그 시기는 인도 발생의 불교가 사방으로 퍼지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필자는 대머리의 '아르기 파이오이' 사람들은 불교 승려 집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다. 알타이 지방에 대한 소식이 스키타이 족들의 입을 통해 넓은 스텝지대를 무대로 살았던 유목민들에게 전해졌고, 흑해까지 온 헤로도투스 귀에도 들어 갔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헤로도투스와 사마천은 여행자였다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인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5)은 원래 사관(太史令)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역사를 기술하기 전에 중국과 그 주변의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그래서 왕정 중심의 기록과 함께, 당시까지 전해 내려온 각계의 인물지를 열전으로 남겼다. 그래서 '사기(史記)'는 2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빛나고 있다.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교과서 중에 하나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2세기에 완성되었다. 삼국사기도 '사기'처럼 나라 순서, 왕의 순서를 따라 기록한 기전체이다. 그리고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로 이어지며 지에서 제사, 악(惡), 색복,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등 인류학적인 기록을 해 두었다. 그 다음이 지리로서 신라, 고구려 백제를 기술하였다. 마지막이 직관과 열전이다. 이런 것을 볼 때 삼국사기는 '사기'를 모델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인 김부식은 경주사람의 후손으로 21세 때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경험하다가 41세 때인 1096년에 송나라에 가는 사신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이때 약 6개월을 송에 머무르면서 견문을 넓힌다. 10년 후인 1126년에 다시 송나라에 사신으로 재입국하여 송나라와 금나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국제정세를 살피고 돌아온다. 당시 고려는 북방민족이 세운 금나라 보다는 한족의 나라인 송을 종주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국제 정세상 북방민족의 땅인 만주나 요하지방을 돌아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도 고구려의 요동군이 중국의 낙양으로부터 3천6백리 떨어진 곳이라는 한서 지리지를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왼쪽부터 헤로도투스, 사마천, 김부식

전기 스키타이의 고향인 우크라이나에서 후기 스키타이 땅인 카자흐스탄 사이에는 산이 없는 평원뿐이다. 그러니까 기마민족인 스키타이 족이 쉽게 동서로 이동하며 살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현지에 가면 쉽게 느낄 수 있다. 그 지역은 5세기 동안 일어난 아틸라 왕이 이끌던 훈족이 로마까지 질풍노도처럼 내닫을 수 있는 지형이다. 그러나 더 동쪽으로는 알타이 산, 천산산맥, 타클라마칸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서 스키타이의 이동은 거기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3세기 때 몽골인들은 횡단하기 힘든 사막을 피하여 천산북로를 개척하였다. 그 결과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내용처럼 중앙아시아와 유럽이 징키스칸의 세력에 무릎을 꿇었다.

김부식이 압록과 요하를 답사했다면?

한국고대사의 주인공들인 고조선, 부여, 고구려 사람들의 활동 무대에는 서쪽의 연산과 대능하, 흥안령과 요하 그리고 백두산과 압록강 일대였다. 한국사는 고대사로 갈수록 지리적으로 넓은 땅에 유목민과 농경인이 섞여 살았던 '국제사'이고 중세, 근대사로 올수록 농경 방식으로밖에는 살 수 없는 땅의 '국지사'(局地史)로 좁아진다.

물은 길이 되고 산은 국경이 되는 것은 평범한 진리이다. 오늘날도 히말라야 산맥은 중국과 인도의 국경이고, 힌두쿠시 산맥은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의 국경이 되어있다. 북쪽의 알타이산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의 4개국의 국경이다. 국경이 될 수밖에 없는 산맥지대를 무기의 힘으로 무너뜨리려는 21세기 강대국들의 영토 팽창주의는 자원 확보 전쟁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오늘날의 중요한 자원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는 영토분쟁에서 희생된 민족들의 원한만 역사에 남는 법이다. 역사는 후세까지 기억되며 보복이 따를 수도 있다.

김부식이 요하유역에서 압록강까지의 땅을 답사하였다면 삼국사기의 내용이 훨씬 윤기 있을 뻔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역사학자가 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먼저 여행가가 되는 것을 권고한다. 역사학의 아버지는 지리학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