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한국사에서 동해(東海)와 울릉도(鬱陵島)가 어떤 의미를 지녔고 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왔는지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조건이 우리 역사의 진전에 큰 영향을 미쳐왔음은 주지의 사실인데, 한반도에서 가장 긴 해안을 가진 동해, 그리고 그 속에 절해고도로 자리 잡은 울릉도 역시 한국문화의 형성과 전개과정에서 중핵으로 기능해왔다.
그렇지만 동해와 울릉도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는 대단히 부족한 실정이다. 그것은 당연히 자료의 부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를 기획한 것은 근래 새로이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 등 문자자료가 발견되었고 더불어 동해와 울릉도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중요한 자료를 다수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료를 잘 정리하고 분석하면 이 지역 역사와 문화의 한 단면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고 이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삼국시대 동해안지역 주민에 대하여 특히 관심을 기울여 보려 하였다. 고고학 자료나 금석문 자료에는 그 자료를 남기고 또 그 자료에 연관된 지역사람들의 모습이 잘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동해안 지역을 대상으로 연구할 때 이 지역 사람들의 입장에 대한 배려가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토기, 고분, 농경과 어로, 무기, 지배방식 등 다각적 고찰
제1장인 '영남 동해안지역의 신라토기문화'(이한상)는 영남 동해안지역의 고고자료 가운데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토기에 대하여 분석한 글이다. 먼저 각 고분군 출토 신라양식 토기를 편년하고 그 편년안에 기준하여 각 지역에 언제 쯤 신라 토기가 등장하는지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울산과 포항지역에 신라토기가 등장하는 것은 5세기를 전후한 시기이고, 보다 북쪽에 위치한 영덕과 울진지역의 경우 5세기 중엽 이후임을 알 수 있었다.
제2장인 '영남 동해안지역의 삼국시대 고분문화'(홍보식)에서는 영남 동해안지역의 삼국시대 고분이 지역적으로 어떻게 분포하는지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영남 동해안지역에서 고분이 가장 밀집한 곳은 포항시 흥해읍의 초곡천변과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냉천의 북안, 울산의 회야강 하류역이다. 이 지역에서는 경주의 전형적인 묘제인 적석목곽묘를 모방한 무덤, 즉 유사 적석목곽묘가 존재하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러한 묘제는 이 지역과 신라 중앙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제3장인 '영남 동해안지역의 농경 및 어로문화'(김재홍)는 영남 동해안지역의 삼국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농기구와 어구를 분석한 다음 그것을 토대로 당시의 생업경제를 복원해본 글이다. 이 지역 철제 농기구는 종류와 형태로 보아 신라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지적하였다. 어구가 발견된 고분은 항구 주변에 위치하며 대체적으로 무기와 농구, 어구가 함께 출토되고 있다. 이는 항구를 장악하고 있던 해안가의 수장들이 농경과 어업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주변지역과 폭넓은 상호교류를 지향하였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제4장인 '철제무기로 본 동해안지역의 군사적 성격'(우병철)은 영남 동해안지역의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를 분석해 봄으로써 이 시기 동해안지역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려 하였던 신라의 중앙 사이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검토한 글이다. 무기의 제작과 소유의 중심은 신라의 왕도 경주였으며 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철기의 생산을 독점하고 주변 세력에게 필요에 따라 사여한 것으로 보았다.
제5장인 '5~6세기 신라의 동해안 지역 진출과 지방지배방식'(홍승우)은 역사기록을 중심으로 5~6세기의 신라가 영남 동해안 각지로 진출하면서 영역화하는 과정과 그 지역을 어떻게 지배하였는지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신라는 3세기 중엽 이후 5세기대까지 동해안지역을 직접적으로 지배하지는 않았고 소국 수장층을 매개로 하는 간접지배방식을 취하였다. 6세기 이후가 되면 지방관을 파견하여 율령에 근거한 직접지배를 관철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동해안의 고분과 지방지배방식 연구 축적을 기대하며
이번 연구의 성과를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보면, 삼국시대 영남 동해안지역의 경우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곳곳에서 소국이 형성되었으나 곧 신라에 복속되었고 초기에는 자율성을 지녔지만 차츰 신라에 의하여 자율성을 규제당하다가 끝내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영남 동해안지역은 국가 경영에 매우 중요한 수취원이자 국경지대이고 또 대외로 진출하려 할 때 주요한 교통로가 되었으므로 영남 내륙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강고한 지배를 실시하려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대형 고총을 축조하는 지방 세력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연구의 결과는 다섯 편의 논문으로 정리해, 단행본으로 발간했는데 일부 내용은 중복될 수도 있고 또 연구자마다 도출한 결론에서 다소 상치되는 부분이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 연구마다 중점적으로 검토 대상으로 삼은 자료가 다르기에 생겨난 차이라 판단된다. 이러한 점은 연구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개별적인 연구를 모아 보았을 때 드러나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분명히 인식하고 왜 그러한 차이가 생겼는지에 대해 앞으로 검토하여 보는 것도 향후 연구의 진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연구를 수행하는 동안 줄곧 동해안지역의 고분문화나 지방지배방식에 관한 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라는 생각을 하였다. 향후 기초적인 연구 성과가 하나 둘씩 축적되어 나간다면 머지않아 고대사회의 동해안지역문화는 어떠한 특징을 지녔고 그러한 문화를 만들어낸 주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고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 등 다양한 관점에서 삼국시대 영남 동해안지역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