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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9세기 후반, 한반도의 외국인을 연구하다
  • 이윤정 | 사진_ 송호철

재단에서는 동북아의 역사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역사갈등 현황과 우리의 입장을 해외에 알리고, 세계 각국 학자들과 지속적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세계의 유력학자들을 초빙하고 있다. 최근 역사 분쟁의 새로운 해결 대안으로 국가의 경계를 넘어 객관적인 시각에서 역사·사회·문화·정치 현상을 바라보고 연구하려는 트랜스내셔널리즘 즉, 초국가주의가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조선 후기 외국인 사회'를 초국가적인 관점으로 연구하는 재단 초청학자 클라우스 디트리히(Klaus Dittrich)를 만나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_ 편집자 주

클라우스 디트리히(Klaus Dittrich)

2006년 프랑스 Université Lumiereé-Lyon 2에서 근대역사로 석사학위를, 2010년 영국 the University of Portsmouth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영국 동 대학에서 포스트닥터 과정을 밟으며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 초국가적 요소, 1880~1910》을 출판 준비 중이며 초국가적인 관점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클라우스 디트리히

박사전공이 트랜스내셔널 역사라고 알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한 주제들을 보면 초국가적인 현상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국경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 항상 관심을 가져왔다. 폴란드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석사학위는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는 영국에서 받으며 개인적으로도 초국가적인 배경을 가지게 됐다. 처음에는 유럽만 관심을 가졌는데 2005년 시베리아 횡단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아시아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학문적으로는 학부 때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트랜스내셔널 역사로 방향을 잡았다. 유럽의 트랜스내셔널 역사 센터들 중 하나가 바로 라이프치히 대학에 있었고, 그곳에서 다양한 접근법을 접하며 영향을 받았다.

현재 한국 근세사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된 계기는?

"19세기 후반 세계박람회에서의 교육"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일본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일본연구는 동아시아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는데, 특히 '19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집중하게 되었다. 때마침 국제교류재단, 독일학술교류서비스의 장학금을 받게 되어 한국에 왔고, 올해 한양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에서 한국 역사에 대한 첫 번째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조선후기 외국인사회를 '부르주아 집단', '초국가적인 집단'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는가?

1880년에서 1910년 사이 조선에 온 외국인들은 크게 4가지 그룹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외교관, 조선 정부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가, 비즈니스맨, 선교사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교육을 잘 받았고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가졌다. 당시 외국인들 중에는 선원, 경호원, 광부들도 소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집단이 앞에서 소개한 부르주아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연구하게 됐다. 이 외국인들을 초국가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은 첫째, 그들은 미국, 유럽 등 다양한 배경을 가졌으나 한국에서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둘째, 그들 대부분은 한국으로 오기 전에 중국이나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생활한 적이 있다. 셋째, 이들은 한국에 살면서 자신의 모국과 여전히 접촉하였다.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이들을 초국가적인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한 곳에 정착하는 대신 국경을 넘나들고 늘 움직이며 살았다. 증기선, 전보, 인쇄물 같은 현대적인 통신수단을 잘 사용했던 이들은 1900년대를 중심으로 국제화의 전초에 있었다.

클라우스 디트리히

이들 초국가적인 집단의 조선에 대한 인상 및 평가는 어땠나? 조선의 정치·경제·문화·교육 등의 분야에 대한 이들의 시각이 궁금하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발간했던 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을 보면 외국인들이 조선을 상당히 후진적인 사회로 생각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외국인들은 조선정부의 부패가 심하고 관료들이 게으르며 경제적인 잠재력도 충분히 사용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비난했으며, 유교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또, 한자가 조선의 발전에 장애가 되며 한글을 사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외국인들은 자신들이 조선에 들어오며 문명사회를 열었고 이를 통해 낙후된 조선이 혁신했다고 생각했다. 한편, 일부 외국인들은 조선의 역사·문화·언어에 대해 무조건 비판하는 대신 진지한 관심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몇몇 사람들은 유사 과학적인 논문과 책들을 펴내기도 했다.

반대로 이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평가는?

미국과 유럽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들은 외국인에 대해서 굉장히 다양한 시각을 가졌다. 대표적인 시각으로는 외국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본 것이다. 그에 대한 유명한 예로 1888년의 '아기 폭동'을 들 수 있다.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외국인들이 조선 아기들을 죽여서 요리를 해 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폭동으로 인해 외국인이 다치진 않았지만 군중들을 진정시키는 데 굉장히 어려웠다고 한다. 또,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외국인들이 지나갈 때마다 군중들이 몰려 쳐다보곤 했다. 유교학자들은 외국인들을 굉장히 싫어한 반면 독립협회 같은 단체를 만든 개혁파들은 외국인들을 굉장히 좋아하고 존경했다.

조선에서 일본의 힘이 커지는 데 대한 외국인 집단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외국인 집단의 반응이 굉장히 다양했기 때문에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아시아에 머물러 있던 외국인 집단들은 각자 거주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The Korean Repository"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했을 때 굉장히 비판적인 글을 썼다. 그러나 일본에 있던 외국인들은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이 질문에 대해 상당히 관심이 있는데, 지금은 연구의 초기단계라 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 후기 외국인 사회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는?

이 프로젝트의 의의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재한 외국인 사회를 살펴봄으로써 한국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다. 외국인 집단이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이 주제를 연구함으로써 인구이동, 이민, 초국가적인 삶에 대한 이해에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단 초청 학자로서 동북아역사재단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동북아역사재단은 동아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연구결과를 교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기관으로서 한국적인 관점을 자연스럽게 강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재단의 활동은 학문적, 사회적, 정치적인 측면에서 한국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