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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대문화 속의 울릉도-토기문화
  • 이성주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한반도 고대문화 속의 울릉도-토기문화

동해는 남한과 북한, 러시아, 일본열도로 둘러싸여 있다. 오늘날 동해는 이를 둘러싼 4개국의 호혜적인 교류와 전략적인 충돌이 교대되는 무대이며, 그 동해의 한가운데 우리의 영토 독도와 울릉도가 자리 잡고 있다.

고고학 연구자로서 울릉도를 볼 때 가장 흥미 있는 점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이다. 첫째로는 섬의 면적과 지형적인 여건에 견주어 엄청난 수와 규모로 축조된 신라고분이고, 둘째로 약 350년 간으로 추산되는 신라의 점유시기 말고는 그 이전과 이후 어느 기간에 해당하는 고고학 자료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적과 유물만 가지고 생각한다면 512년 이사부(異斯夫)가 당시 우산국(于山國)이라 했던 이 섬을 복속시키기 이전과 고분 축조가 중단되는 그 어느 시점 이후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왜 신라인들은 이 척박하고 멀리 떨어진 섬에 들어와 그 많은 고분을 축조했을까? 이 기간 중 신라인들은 왜 울릉도와 지속적으로 교통하고 변함없이 관리했을까? 울릉도와 본토 사이의 물자교환을 포함한 교류는 어떠했으며 우리는 그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확대하여 생각하면 그러한 관계를 당시 신라, 고구려, 왜국, 그리고 뒤에는 발해 사이의 정치적 교섭의 맥락에서 이해해 볼 여지는 없는가? 물론 이러한 질문들은 단번에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 책은 그러한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을 담고 있다.

울릉지역 신라 고고학 자료 이해의 토대 마련

이 책에서 집중하여 다룬 자료는 토기다. 울릉지역에서 가장 많이 조사된 자료가 토기이기도 하지만 본토와의 교류, 울릉지역민의 생산과 소비, 고분의 축조 연대를 파악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6세기 이후 통일신라에 이르는 시기의 물질자료는 신뢰할 만한 수준의 편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통일신라 고고학 전반에 커다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울릉지역 물질자료의 변천을 파악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 시간적인 편년과 지역적인 차이를 파악하는 것은 울릉지역의 신라 고고학 자료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신라 중심지의 자료를 대상으로 신라후기양식 토기군의 편년을 하나의 연구주제로 뽑았다. 전기양식에 비해 후기양식 신라토기를 편년할 때 부딪히는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매장의 동시성이 파악되는 양호한 자료가 거의 없는 현실이다. 신라의 고분축조가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횡혈계 묘제로 바뀌기 때문에 고분부장품을 중심으로 한 토기편년의 경우 6세기 중엽 이후 통일신라까지는 방법을 달리하여 접근해야만 한다. 기존 자료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편년을 시도해 본 결과, 주요기종의 형식 변천 양상을 밝혔고, 동반관계 분석을 통해 문양의 변천을 한층 심도 있게 파악할 수 있었다.

울릉지역의 고분에서는 다량의 토기가 출토된 바 있는데 그중에는 당시 상위 신분자가 주로 소비했던 인화문병류가 많이 출토되었고 조악한 태토와 기술로 제작된 실생활용 적갈색연질토기가 양호한 질의 회색토기와 함께 조합되는 양상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토기 생산분배망의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할 문제이면서 신라 본토와 울릉지역의 관계를 파악하는 단초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울릉도 내, 4지점의 유적에서 64점의 토기시료를 확보하여 적갈색토기와 회청색경질토기의 생산기법과 원산지의 특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또한 울릉도의 출토 토기유물군에서 제작기술상 일정 지역의 통시적 연속성이 관찰되고 있는 점은 생산 기술의 측면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며, 이는 울릉도에서 토기를 제작, 사용했던 집단의 성격과 관련지어 설명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하였다.

다른 지역처럼 울릉지역도 신라에 복속되어 고대국가 신라영토 내의 지방으로 편제되었다. 6세기 전반의 어느 시점에 특징적인 횡구식 고분과 수입된 신라 토기가 갑작스레 등장하게 되는데 그 양상이 신라의 다른 복속지역이나 지방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성격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적절히 검토해야만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서만 지방고분이 거의 소멸하는 6세기 중엽부터 오히려 고분의 축조가 집중되었던 울릉도의 고고학적 현상을 타당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울릉도 향토자료관에 전시된 신라토기 현포리의 고분 도로의 개설로 파괴된 사동리의 고분

신라 동해상 지배권 확보의 전략적 거점

이 책은 섬의 생태지리학 관점에서 신라의 울릉도 경영과 관련된 문제를 검토하였다.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좁고 평지가 거의 없이 가파른 지형의 울릉도는 생태지리적 여건에서 주민이 본토로부터 격리된다면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섬에 6세기 전반부터 적어도 9세기 전반까지 350년 동안, 대단한 규모로 고분이 축조되었던 사실은 섬 생태학의 관점에서도 무척 특이한 현상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막대한 양으로 공급된 토기, 동관이나 마구와 같은 귀중품의 제공 등은 신라가 울릉도를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고고학적 증거를 모아 다음과 같이 추론하고 있다. 첫째, 울릉도에는 이사부의 정벌 이후 소수의 상위 계층을 포함한 신라인이 이주하여 섬의 원주민이 있었다면 이들과 중층적 계급사회가 형성되었다. 둘째, 신라인을 매개로 삼국 후기와 통일신라 전 기간에 걸쳐 울릉도는 육지와 지속적, 정기적 교류를 통해 토기를 비롯한 각종 물품을 제공받았다. 셋째, 이러한 정착과 지속적인 교류는 신라인의 필요(특산물의 수급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든)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무튼 이 책에서는 이사부에 의한 울릉도 복속이 단순한 영토 확장이나 공물 수취를 위한 진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거리도 멀고 가용자원도 빈약한 울릉도에 진출하여 지속적으로 경영하려 했던 배경에는 당시까지 동북아의 어느 세력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동해상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신라인의 의도가 숨어 있을 것으로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