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3일, 재단 독도연구소에서 2009년 한·일 간 독도 국제소송을 다룬 장편 소설 《독도 인 더 헤이그》의 서평회가 열렸다. 독도영유권을 둘러싸고 있을법한 국제 소송에 대비하고, 일본 주장의 허구성을 알려 독도영유권을 수호하기 위해 국제법과 역사학적 증거의 중요성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였다. _ 편집자 주
서평을 부탁받았다. 그것도 소설책을. 역사학자가 소설책을 서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망설이다 용기를 냈다. 《독도 인 더 헤이그》는 매우 사실적인 소설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저자 하지환(본명 정재민)은 법학을 전공한 현직 판사다. 그는 2004~2006년 국방부 국제정책팀에서 법무관 생활을 하는 동안 독도 문제에 관심이 생겨 직접 헤이그까지 다녀왔다. "일본 주장의 허구성을 여러 측면으로 연구했지만 법관 신분으로 따질 얘기는 아니라서 소설로 썼죠."(조선일보, 2011.04.26) 저자는 소설책을 썼지만 그의 본심은 독도 관련 일본 주장의 허구성을 파헤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락국기》의 비밀은 독도소송 승리의 핵심 카드
저자는 "가락국기는 태양의 남매가 잠든 곳에 삼족오 한 쌍은 팔대의 상궁으로 날아갔네. 북두 위의 상궁에서 태상의 방향으로 거북의 가슴을 파고들라"라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내용을 중심으로 독도를 파고들었다. 일본에까지 영향력을 끼친 가야의 해상활동으로 미루어 독도도 가야의 영토였으리라는 가설을 세우고 그 증거가 담긴 고대문헌 《가락국기》를 한국의 독도소송 승리의 핵심적인 카드로 내세운다. 주인공 도하와 은성, 서준이 《가락국기》의 비밀을 담은 암호문을 풀고 일본에서 고대 유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다뤘다.
《가락국기》는 가야의 역사책으로 현재 책은 전하지 않으나 일부 내용이 《삼국사기》에 요약되어 남아 있다. 저자는 거의 마지막 대목에 주인공을 통해서 《가락국기》의 내용을 풀어 주었다. "우산국은 서쪽의 모도와 동쪽의 자도로 이뤄졌다. 두 섬 사이의 거리는 2백리로 서로 멀지 않다. 모국의 거등 대왕께서 점령하신 후 모도는 수군 기지와 어항으로, 자도는 중죄인들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이에 본국도 자도에 중죄인을 보내곤 했다."(417쪽) 즉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독도 관련 한국과 일본 주장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한국 주장은 첫째, 신라 지증왕이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한 이후부터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한국 땅이었다. 둘째, 조선은 17세기 조선의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온 일본어민들을 내쫓고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으면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했다. 셋째,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배하다가 물러가는 과정에서도 연합군 최고사령관 지령이 스캡이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등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독도는 한국 땅이다(313쪽).
일본 주장은 첫째, 1618년부터 일본 어민들은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도해 면허를 받아 울릉도와 독도에서 어업을 해왔다. 둘째, 한국이 19세기 이전에 독도를 소유했다는 증거는 없다. 한국이 신라·고려·조선 시대에 '우산'이라는 섬을 소유했지만 그 '우산'은 울릉도이지 독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1905년 일본은 독도를 시마네 현으로 편입함으로써 무주지인 독도를 선점했다. 넷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받았다(314쪽).
한국과 일본의 주장을 살펴보면서 저자는 주인공 은성을 통해 독도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첫째, 소위 '죽도' 편입조치는 일본 내각이 결정한 뒤 시마네 현에 업무를 하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중앙정부가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선점을 대외적으로 공표해야 한다거나 이해관계국에 통보해야 한다는 국제법상 원칙이 있는가? 셋째, 독도가 이전부터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당연한 전제이지 재판관들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어떠한 주장에도 대응할 수 있는 보다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준비해야 한다.
전근대 독도 관련 영토관리의 역사적 사실
저자는 판사로서 법적인 측면에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독도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되는 과정을 자세히 서술했다. 기존 한국의 국제법학자 대부분은 영토 및 해양 경계 분쟁 관련 국제법 판례에서 영토 관리 사실이 핵심 사항 중 하나라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독도와 관련하여 한국이 영토 관리를 한 역사적 사실로는 무엇이 있을까? 한국인은 고대 이전부터 울릉도에 거주했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 1531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통해 한국정부가 최소 15세기 중엽 울릉도와 독도를 정확하게 인식했고, 그에 대한 영유권을 행사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 또한, 17세기 말 한국 정부는 일본 막부의 '죽도도해금지령'에 기초하여 한·일 양국 현안 중 하나인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공식적인 확인 절차를 마무리했다. 한국 정부는 1694년 삼척첨사 장한상(張漢相)을 파견해 울릉도를 자세히 살피게 했고, 1694년과 1697년 막부의 '죽도도해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울릉도 수토정책(搜討政策, 순검과 수색)을 정식화했다. 그 후 한국 정부는 18세기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 수토를 진행하면서 울릉도의 시찰, 울릉도 자원 조사 및 채취 등을 실제로 실행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본이 소위 '안용복사건'(1693~1696)으로 촉발된 한·일 외교 교섭 이후 1905년 시마네현의 독도편입까지 약 200년 간 독도에 대한 아무런 영유권 주장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6월 내부시찰관(內部視察官) 울도시찰위원(鬱島視察委員) 우용정(禹用鼎)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의 실효적 점유를 강화했다. 그 결과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칙령 41호가 공표되었다. 이것은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대한제국의 영토의식과 주권행사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다.
한국과 일본의 독도에 관한 접근은 뚜렷한 차이가 있다. 한국은 독도가 명백한 한국 영토라는 자연스러운 인식과 증거 때문에 일본을 자극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인위적인 인식과 증거를 만들어서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유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정치적 의도가 독도에 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서술한 독도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되는 과정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하지만 향후 한국과 일본 관계에서 그의 주장은 생각해 볼 문제다. 그 이유는 독도에 대해서 일본의 어떠한 주장에도 국제법과 역사학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