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2일 많은 비가 내리던 수요일 오후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드라마 관련 세미나나 심포지움 등에 발제자나 토론자로 여러 번 참석했지만 이 날은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전설의 고향>을 비롯해 <바람의 나라> 등 많은 사극을 기획하고 연출하였지만, 사극관련 심포지움은 처음이고, 더구나 사회를 맡게 된 때문이다. 다양한 연령층의 방청객과 드라마 <대장금>, <허준>, <이산 정조>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극을 연출한 이병훈 위원과 <주몽>의 연출가이자 MBC 드라마국장을 역임한 이주환 피디를 비롯해 주창윤 서울여대 교수, 김기봉 경기대 교수와 김현숙, 금경숙 동북아 연구재단 연구위원 등 저명한 주제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모여 열띤 논의의 장을 펼쳤다. 방송에서 많은 사극이 제작되고 있음에도 솔직히 관련 학계의 전문가들과 토론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이 그간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날의 심포지움은 참석자의 면면도 화려했고, 방청객들의 관심도 매우 높았다. 특별히 원로 탤런트 이순재씨까지 방청객으로 토론에 참여하여 그 열기가 뜨거웠다.
이 날의 열기가 나타내듯이 우리나라 국민들은 TV드라마를 좋아하고 최근엔 사극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아졌다. 왜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우리나라만 이렇게 드라마를 좋아하고 특히 사극에 많이 빠져드는 것일까? 드라마 피디로서 가끔씩 이런 질문을 받기도 하고 스스로도 던져보기도 하는데, 그건 아마도 우리 민족이 어릴 적 할머니 무릎이나 등짝에 업혀 듣던 '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살았었는데...' 식의 옛날이야기에 익숙해진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극의 매력은 역사를 배우고 새롭게 해석하는 재미다.
드라마 중에서도 '사극'은 묘한 매력이 있는 장르다. 왕조와 백성, 가문과 전통, 도덕과 통치 철학, 명분과 실리 등의 문제와 직면하면서 현대물에서 넘쳐나는 단순한 삼각 멜로나 혹은 출생의 비밀, 불륜 등과는 다른 차원의 주제를 다루어 무게감이 느껴진다. 또한 대사와 선 굵은 연기, 무술 등을 통해 연기자와 연출자 혹은 작가들도 사극 특유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무엇보다 큰 매력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사료와 그 시대를 다룬 책과 논문 등 참고 자료를 검토하고, 이를 대본으로 옮겨 연기자를 통해 영상으로 표현하면서 느끼는 새로운 해석과 역사를 배우는 재미다. 권력을 잡기 위해 충신과 형제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 줄로만 알았던 역사적 인물들이 나라를 위한 통치 철학을 가지고, 신권(臣權)과 왕권(王權)의 치열한 노선 경쟁을 벌인 주인공들이었음을, 드라마를 만들면서 혹은 시청하면서 배우고 새롭게 확인할 때마다 사극만이 가진 매력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방송사마다 사극 전문 피디들이 두각을 나타내었고 꾸준히 그 맥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정작 요즘엔 방송국에 사극을 연출해보겠다는 젊은 피디들이 거의 없다. 제작 과정도 힘들고 PPL이나 협찬 등 제작 지원도 받기 어려운 데다 어느 정도 사료가 남아 있는 시대는 이미 많이 다뤄졌고, 사료가 너무 적은 시대는 많은 부분을 상상력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연출 시절에 어깨 너머로 선배들의 제작 노하우를 익혔다 해도 막상 본인이 연출할 때쯤엔 공부와 준비가 많이 필요하니, 사극보다는 만만한 현대물, 그것도 알콩달콩 사랑 얘기나 로맨틱 코메디를 선택하고픈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또한 요즘처럼 제작비나 예산으로 인한 압박이 심한 때는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극조차도 점점 퓨전 스타일로 변해가고 있다. 촬영 장소 문제는 해결이 어렵다 해도 고증을 비롯해 역사적 실존 인물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복식 문화를 비롯한 당시의 생활상, 나아가 인물의 선택이나 묘사에 있어서도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물군을 자유롭게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역사적 사실이나 시대 배경이 모호해져, 심지어 국적 불명의 사극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역사의 기본 줄기는 지키되 '작가적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사극 지향되어야
필자 역시 사극을 연출할 때 실증적 사실 전달보다는 사료와 역사의 빈 공간을 찾아 상상력에 의존하려 했었다. 그러나 드라마의 오락적 특성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특정 시대와 실존 인물을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는 사극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해당 시기나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 시청자는 물론 어린 학생들이 드라마 속의 사건과 인물을 실제 역사적 사건과 인물로 오해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심포지움은 대단히 중요한 이슈를 시의적절하게 제기하였다.
드라마를 제작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비슷한 종류의 드라마가 유행처럼 같은 시기에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있다. 다들 물밑에서 몇 년 전부터 준비해오던 것들인데 우연히 한 두 작품이 선을 보이면서 동시에 편성이 되는 경우다. 한동안 '태왕사신기', '주몽', '바람의 나라' 등이 인기를 끌다가 잠시 주춤하더니 최근 '선덕여왕', '근초고왕', '광개토태왕'에 이어 '계백'에 이르기까지 가히 삼국시대 사극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그간 많이 다루었던 시대가 아니라서 새롭기도 하고,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이나 고증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기 때문에 점차 퓨전 스타일로 옮겨가는 사극의 트렌드와 맞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에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PD연합회가 공동 주최한 이번 심포지움은 현업 피디의 한 사람으로서 대단히 유익한 자리였다고 판단한다. 역사의 기본 줄기를 지킨다면 작가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 드라마화 하는 것에 모두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한류의 전도사로서 사극이 기여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만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기억을 발굴하고 다종족국가로서의 고구려와 발해의 정체성을 부각해야 한다는 지적은 매우 날카롭고도 적절한 분석이었다. 또 사극드라마의 시작 전후에 교육적 목적을 위해서라도 자막 처리를 하거나 토론회라도 갖자는 의견도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하다.
토론회를 마치고, 앞으로 우리나라 사극의 변신을 위해 역사의 틈새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할 만한 멋진 소재를 찾아 내일 당장 도서관에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