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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새 책
-세계적 보물을 빚은 피랍 조선 사기장을 찾아서- 임진왜란과 히라도 미카와치 사기장
  • 도진순 창원대학교 교수

임진·정유왜란이 '도자기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당시 많은 조선 사기장(도공)들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필자는 지난 2008년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님을 만나 일본 큐슈 현지를 답사하면서 미카와치 도자기가 근대 일본과 세계 도자기 예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빚은 사기장들은 임진·정유왜란 당시 히라도(平戶) 영주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鎭信)에 의해 경남 웅천(熊川)에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후예로, 그들이 세계적인 도자기를 만들게 되는 과정과 사연은 소설보다 곡절 많고 애잔한 것임을 알았다.

이 책은 이러한 미카와치 피랍 사기장의 역사적 내력을 추적한 것으로, 히라도로 끌려간 웅천 출신 사기장 세 가문이 각 지역을 전전하다 미카와치에 정착하여 세계적인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 근대 이후 미카와치 도자기가 몰락하다 현대에 다시 부활하는 과정을 소개하였다.

'고'자에 숨겨진 고국을 향한 그리움

(그림1) 11명의 중국 어린이
그림과 고(高)자 문양

미카와치 도자기는 일본 내에서 황실의 어용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인도회사의 무역을 통하여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때문에 미카와치 도자기는 큐슈도자문화관은 물론 영국의 대영박물관, 터키 이스탄불의 톱카프궁전 박물관, 네덜란드의 라이덴 국립민속학박물관 등에 널리 소장되어 있다.

일찍이(1904년) 동양 도자기 연구의 선구자인 스튜어트 딕(Stewart Dick)은 미카와치 청화백자(靑華白磁)를 '일본 최고의 도자기'이며, 그 중에서도 '가라코에(唐子繪)'를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가라코에는 '중국 어린이 그림'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소나무 아래에서 나비를 쫓으며 평화스럽게 노닥거리는 중국 어린이들의 그림이다. 그런데, 이 가라코에 도자기의 위쪽 입술 아래에는 무슨 암호같이 '고(高)'자(字) 문양이 연이어 새겨져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자가 거꾸로 서 있다(그림 1). 피랍 조선 도공들은 왜 중국 어린이를 그렸을까? 전쟁으로 피랍된 조선 도공들이 조국의 고향에서 평화스럽게 놀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또는 그곳에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직접 표현할 수 없어서 중국 어린이를 그리고, 대신 암호와 같이 '고'자 문양을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라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애틋함에 가슴이 아리고, 심장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잊혀지지 않는 '고'자의 마력

'고'자의 마력에 끌려 시작한 이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문헌 연구로는 히라도의 마쓰라사료박물관에 비장된 『히라도 도자기 연혁 일람(平戶窯沿革一覽)』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고, 다음으로 히라도와 마카와치 일대의 답사를 통하여 문헌 자료에 나타나지 않는 가마터와 신사, 비석과 비문을 조사하였다.

(그림2) 조선도공묘의 고려비 전경과
정상의 고(高)자 문양 장식

이러한 방법으로 얻은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히라도 본섬에서 조선 사기장의 첫 마을인 고라이마치(高麗町)와 첫 가마 나카노가마(中野窯)에서 시작하여, 중간 거점 시이노미네(椎ノ嶺), 웅천 출신 3대 사기장 가문이 합류하여 황금시대를 구가하는 미카와치의 가마 자리를 추적·정리하였다. 둘째, 히라도 본섬의 고려묘지와 고려비(碑)(그림 2), 시이노미네의 고려사(高麗祠), 미카와치의 가마야마신사(窯山神社)와 도조신사(陶祖神社) 등 웅천 출신 사기장의 묘와 기억·기념시설도 일일이 조사하였다. 셋째, 히라도의 마쓰라사료박물관, 미카와치의 도자문화회관, 사가현의 큐슈도자문화관 등에 소장된 관련 유물과 자료도 조사하였다. 넷째, 과거의 미카와치 사기장과 도자기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 가문의 후예들을 추적하여 이들의 근황을 정리하였다. 이 연구 결과들은 앞으로 한·일 간의 문화·경제 교류에서 중요한 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림3) 가라코에 사발, 에도후기,
아리타가마

2008년 10월, 히로시마현() 쿠레시()의 조선 통신사 관련 전시에서 한 점의 도자기가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현지 설명판은 임진·정유왜란 당시 끌려온 이삼평이 도조(陶祖)로 되어 있는 아리타 가마(有田窯)에서 에도 후기에 만든 '가라코에사발'로 표시되어 있었다(그림 3). 이 가라코에 윗부분에는 또 다른 '고'자 문양이 있었다. 그런데 이 '고'자 가라코에의 그림은 소나무 아래서 나비를 쫓는 어린이가 아니라 인물화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고'자 가라코에는 히라도뿐만 아니라 아리타 등 다른 지역으로도 확대된 것인가?, '고'자 가라코에 그림은 소나무 아래 어린이들이 나비를 쫓는 미카와치도자기 이외 어떤 다른 것이 있는가? 즉 '고'자 가라코에는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다. 사실 미카와치 도자기를 대표하는 가라코에 도자기가 언제 누구에 의해 창안되었으며, 시기적으로 언제까지, 지역적으로 어디까지 확대되었으며, 어떠한 그림들이 있는지 등은 아직 정확하게 해명되지 않았다.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피랍 조선 사기장의 흔적을 찾는 답사가 이루어지길

책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다소 외람되지만 이 책에서 조사한 지역은 피랍 조선 사기장의 흔적을 잘 볼 수 있는 훌륭한 답사 코스이며, 이 책의 제목처럼 '피랍 조선 사기장을 찾아서'와 같은 의미 있는 답사가 한·일 공동으로 실현되기를 감히 기대해 본다.

필자는 이러한 답사가 단순히 민족주의적 감정만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일 간 비극의 역사에서 진정한 교훈을 찾으려는 보다 진지한 작업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일본 도요지에 있는 감시초소 등을 보고 피랍 조선 도공들을 감금하기 위한 것으로 흥분하고 일본을 규탄하는 경우가 많다. 사기장을 납치한 것은 물론 규탄 받을 일이며, 또한 그님들이 고국 조선을 그리워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 영주들은 도자기 무역이 그들의 중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피랍 도공과 도자기 사업을 특별히 지원·보호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감시초소를 설치한 까닭은 조선 도공들을 감시하기보다는 특급 보호 대상이었던 중요한 도자기 기술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전쟁 당시 조선에서 기술자를 보호 육성하지 못한 것도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한일 간 비극의 역사도 진실에 기반할 때 진정 평화의 초석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