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월 26일 정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그 노바야 제레브냐 구역 쵸르나야 레츠카 거리 5번지에 위치한 아파트 2층에서 한말 친러파의 거두이자 아관파천(俄館播遷)의 핵심인물로 대러시아 외교활동의 주역이었던 이범진 공사가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이범진은 고종황제와 장남 이기종(李璣鍾), 그리고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영어로 쓴 전보 형태의 유서를 남겼다. 고종황제에게 보낸 전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황제폐하, 우리나라는 멸망했습니다. 황제께서는 모든 권력을 박탈당하셨습니다. 저는 우리의 적들에게 복수할 수도, 응징할 수도 없어 절망적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결로써 목숨을 끊을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이범진."
이범진은 철종과 고종대에 군과 경찰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이경하(李景夏, 1811~1891)의 서자로 태어났다. 성격이나 기질이 부친을 크게 닮아 호탕하고 활달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884년 갑신정변의 급박한 상황에서 명성황후를 안전하게 도피시킨 공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고, 1895년 3월 삼국간섭 이후에는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오영섭(2007), <명성황후와 이범진>, 《다시 보는 명성황후》). 명성황후 시해 사건(1895.10.8) 당시, 고종의 명령을 받아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하여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학살만행, 명성황후 시해 위험을 알렸다. 이후 그가 주도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1895.11.28, 고종을 궁궐 밖으로 구출하여 친일파정권을 타도하고자 한 사건)이 실패하자, 일본정부는 히로시마에 수감 중이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일본인 연루자들을 무혐의로 석방하였고(1896.1.20), 고종과 명성황후의 측근들을 압박하였다.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던 러시아 공사와 고종 간의 비밀연락을 책임졌던 이범진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를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시키는 데 성공했다(1896.2.11).
아관파천의 성공으로 명실상부한 친러파의 거두로 부상한 이범진은 법무대신 겸 경무사로 임명되어 명성황후 시해사건 재수사에 착수하였다. 객관성 확보를 위해 요코하마 주재 북미총영사를 지낸 미국법무영사 그레트하우스(Gretkhauz)를 영입하여, 일본인들을 무혐의로 처리한 친일내각의 발표내용이 조작임을 밝혀낸 보고서를 각국 신문과 잡지에 배포하였다.
최초의 주러 상주 한국공사로 외교활동을 펴다
얼마 후 미국특명전권공사로 파견되었지만(1896.6.20), 열악한 재정사정 때문에 주미공사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주미공사로서 이범진의 활동은 미국정부의 행정부 인사들을 면담하는 등 의례적인 활동에 머물렀다.
1899년 3월 15일, 주러·불·오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공사로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공사를 겸임하다가, 1901년 3월 12일에 주러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외교에 전념하게 되었다. 사실 민영환이 첫 한국공사로 상트 페테르부르그에 왔었지만(1897년 5월), 그 때는 외교신임장 작성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명살상부한 최초의 주러 상주 한국공사는 이범진이다.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반도 강점으로 주러공사로서 그의 처지는 매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황제의 특별명령에 따라, 일본의 불법적 을사조약 체결(1905.11.17)로 외교권이 박탈될 때까지 주러공사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이범진은 1907년 고종황제가 일본의 을사조약 강제체결을 규탄하기 위해 파견한 헤이그밀사에 외국어에 능통한 그의 아들 이위종을 합류시켰다.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고종황제의 강제양위와 군대해산 등 일본의 한국침략이 심화되고 이에 따라 항일운동이 고조되자, 1908년 봄에는 이위종에게 군자금 1만원을 지참시켜 러시아 연해주로 파견하여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등과 함께 의병조직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였고, 이해 7월 이후 동의회 소속 의병들은 함경도 북부 국경지대로 진격하여 일본군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일본은 국내외에서 반일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고 이범진과 이위종 부자 역시 사건배후 혐의를 받아, 국내의 가족들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특히 장남 이기종은 3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조사받았다. 가족들에 대한 탄압과 감시, 국내재산 몰수로 이범진을 곤경에 빠뜨린 일본은 신변보장과 면책을 미끼로 국내로 유인하고자 했으나 이범진은 이를 거부하였다.
자신의 삶과 대한제국의 운명을 일치시킨 대한의 충신
이범진은 러시아외무부와 서울주재 러시아총영사관의 연락망을 활용하여 고종황제와 비밀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1910년 6월경부터 러시아정부가 일본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하면서 이마저 힘들어졌는데, 고종황제는 최후의 밀사로 이갑을 파견하여 자신의 러시아망명과 러시아군 지원활동을 추진하려 했다. 자결 전날 만난 '리잔(Lizan) 대령'은 고종의 밀사 이갑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 계획의 실패와 '합병' 이후 연해주 항일세력에 대한 러시아정부의 탄압은 이범진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고 자결을 결심케 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범진의 근왕주의적 정치노선과 양반출신의 세도가적 행동방식, 특히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거부하자"고 했던 인아거일(引俄拒日)의 책략은 외세의존적 편중외교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의 정치이념과 외교 노선에 한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과 대한제국의 운명을 일치시켜 항일국권회복운동에 기여한 점에서 항일 애국자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