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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Q&A
올해는 '만주사변'이 발생한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만주사변이 발생한 까닭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 윤휘탁 한경대학교 교수

Question

만주사변이 발생한 까닭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Answer

'만주사변(滿洲事變)’은 1931년 9월 일본이 무력으로 중국의 동북지역(만주)을 점령한 사건으로 “유조호(柳條湖)사건” 또는 “9·18사변”이라고도 한다. 19세기 이후 만주는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 백계(白系) 러시아인, 유태인 등 주변 민족들이 이주해 오면서 민족모순이 가중되어 민족 충돌 가능성마저 상존하고 있었다. 특히 1931년 6월부터 7월까지 나까무라(中村)대위 살해사건,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등이 일어났고, 만보산사건의 여파로 조선에서는 화교(華僑) 배척사건이 발생하였다. 8월에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습격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중·일 양 국민의 감정이 점점 악화되었고, 일본 군부(軍部)에서는 무력으로 만몽(滿蒙)문제를 해결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결국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심양(瀋陽) 북부 교외의 유조호 부근으로 일본군 장교를 보내 남만주철도 일부를 파괴하였다. 관동군은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우기면서 중국 동북군의 주둔지인 북대영(北大營)과 심양성(瀋陽城)을 점령하는 동시에, 수일 동안 요녕성(遼寧省) 및 길림성(吉林省)내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이때 중화민국의 주석 장제스(蔣介石)는 일본군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국군에게 저항하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중국정부는 일본군이 불법적으로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했다고 간주하고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하며, 점령지로부터의 일본군 무조건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은 재만 일본인(재만 조선인 포함)의 안전 문제를 들어 점령지로부터의 자국군 철수를 거부했고, 중·일 쌍방 간의 협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이때 일본 군부는 확전을 통한 만몽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주장한 반면, 민간 지도부에서는 자제와 더불어 외교적 해결을 주장하였다. 국제연맹에서는 일본의 만주 점령이 부전조약(不戰條約) 위반이라 하여 점령지로부터의 일본군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처럼 만주사변 당사국들이 외교적 논쟁을 벌이는 동안, 같은 해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불과 4개월여 만에 만주 전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만주의 친일분자들을 사주해서 자치독립운동을 부추긴 뒤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집정(執政)으로 삼아 3월 1일 괴뢰국인 ‘만주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만주사변 발발을 전후로 만주 거주 조선인들 중에는 중국군 패잔병으로부터 폭행이나 약탈, 심지어 살해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으로 귀환하였고, 일부 화교들도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중국 내에서는 배일(排日)운동이 증폭되어 각지에서 반일단체나 항일의용군이 조직되었고 일본상품 배척운동도 거세졌다. 결국 만주사변은 만주에서의 다양한 민족모순 증폭으로 중·일 양 민족의 감정이 악화된 가운데 민족 충돌을 빌미로 삼은 일본의 대륙 침략 신호탄이자 동북아시아의 민족모순이 만주를 매개로 폭발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