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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중·일 영토분쟁의 시사점 영유권분쟁과 무력사용 문제
  • 김찬규 국제해양법학회 명예회장(경희대 명예교수)

"실력을 숨기고 자세를 낮춘다(韜光養晦)"던 중국이 "큰 나라로 우뚝 섰다(大國崛起)".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 사태를 보고 난 후의 소감이다. 일본이 자국령이라 외치던 센카쿠 영해 내에 중국 어선들이 떼를 지어 들어가고 해감총대(海監總隊·우리나라 해양경찰청에 해당) 소속 해양감시선들이 '주권수호를 위한 항해'라며 무려 7시간 동안이나 머물렀는데도 일본 측의 반응은 해상보안청 순시선들이 출동해 "그곳이 일본 영해"라고 방송한데 불과했다. 그리고 지난 9월 10일 중국은 이곳에 영해기선(領海基線)을 선포했다.

국제법상 영해 내에서는 외국 선박에 대해 무해통항권(無害通航權, right of innocent passage)이 인정되고 있다. 여기서 '무해(無害)'라 함은 연안국의 '평화·안전 및 질서에 유해하지 않는 것'을 뜻하며 선박의 통항이 이와 같은 것인 한, 그 통항은 선박의 권리로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해통항의 의미이다. 그리고 어선에 대해서는 무해통항권이 인정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어선에 무해통항권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물 등 어구(漁具)를 격납(格納)하고 통항해야 한다. 중국 어선들이 이러한 요건을 준수하지 않았는데도 일본 측은 이를 실력으로 저지하지 못했다. 영유권 분쟁이 있는 곳에서 실효적 지배의 상실은 영유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 같은 사태가 일시적인 것인지 영속적인 것인지 우리로서는 그 귀추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영유권분쟁 해결을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 3가지 사례

제2차 세계대전 후 영유권분쟁 해결을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 사례가 3차례 있었다.
1961년에 있었던 인도의 고아(Goa) 침공, 1974년에 있었던 중국의 시샤(西沙)군도 침공, 그리고 1982년에 있었던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이 그것이다. 인도령 내에 있던 고아, 다만(Daman) 및 디우(Diu)의 법적 지위에 대해서는 독립 후 인도도 인정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1961년 인도는 이 3곳을 점령하고 자국령으로 편입해버렸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당시 인도대표는 자국의 행동을 '계속적인 침략(permanent aggression)'에 대한 자위권 행사라며 정당화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사국들이 견해를 달리해 규탄 및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결의가 채택될 뻔 했으나, 소련(당시)의 거부권 행사로 불발에 그쳤다. 1974년 중국의 시샤군도 침공은 사이공 월남정부 패망직전의 대혼란 속에서 일어난 것이어서 세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기정사실이 돼버리고 말았다.

지난 1982년 포클랜드 제도 사건 때는 즉각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어 아르헨티나를 규탄하고 아르헨티나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가 채택됐다. 결의 채택에 는 당시 비상임이사국이었던 요르단과 우간다도 찬성투표를 했는데, 그들은 아르헨티나가 유엔 헌장상 금지된 무력사용을 했기 때문에 규탄결의에 찬성 투표를 했을 뿐, 그나라의 대의(cause)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부언(附言)했었다.
여기서 우리는 국제사회에서는 목적보다는 수단이 중요시 되고 있는 점을 보게 된다. 국제사회에서는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수단이 적법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영유권 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 드는 경우라고 할 것이다. 현 국제법상 영유권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1970년 유엔 총회 결의 제2628호로 채택된 〈국가간의 우호관계 및 협력에 관한 국제법원칙 선언〉에는 이에 관한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모든 국가는 타국의 현행 국경선을 침범하는, 또는 영토분쟁 및 국가의 경계에 관한 분쟁을 포함한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행사를 삼가야 할 의무를 부담한다"는 규정이다. 이문건은 유엔 총회 결의이지만 유엔 헌장에 대한 유권적 해석이기에 법적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에대해서는 1974년 채택된 "침략의 정의"에 관한 유엔 총회결의에서도 '무력의 선제적 사용'을 '침략행위의 일응의 증거(prima facie evidence)'라고 함으로써(제2조) 그 궤(軌)를 같이 하고 있다.

무력으로 영유권분쟁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

그렇다면 현 국제법상 영유권분쟁을 무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사한 제도는 국내법에서도 발견된다. 점유(占有)를 보호하는 제도가 그것이다. 국내법에서는 점유권을 인정해 소유권자라 할지라도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실력으로 점유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사례는 국제사회에서도 그대로 인정돼 설사 목적물에 대해'보다 확고한 권원(a better title)'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실력으로 그것을 회복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영유권분쟁이 있는 지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침략이 진행중인 것으로 간주해 '보다 확고한 권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국가가 자위권 행사로 당해 지역에 대한 탈환을 시도 할 수 있는가? 앞서 본 인도의 고아 침공 때 일어났던 쟁점이지만,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소련(당시)의 거부권 행사로 결말을 보지 못했던 문제이다.

생각하건대, 이 경우도 적법한 무력행사로 볼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현 국제법상 개별 국가에 의한 무력행사는 자위의 경우에만 인정돼 있고 자위라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무력공격'이 있어야 하는데(유엔 헌장 제51조 참조), 상기한 바와 같은 상황을 무력공격이 있는 상황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무력공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니카라과 사건에 대한 1986년 6월 27일의 국제사법재판소(ICJ) 판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무력공격은 국경을 넘는 정규군의 행동 뿐 아니라 정규군에 의해 수행되는 무장한 단체·집단·비정규병 또는 용병의 한 국가에 의한, 또는 한 국가를 위한 파견 혹은 그러한 일에 대한 국가의 실질적 개입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판결문 제195항)".
영유권분쟁이 있는 지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이러한 요건에 해당한다고는 어느 모로 보아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영유권분쟁을 자위권 행사라는 명분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며, 영유권분쟁이 있는 지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보다 확고한 권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국가가 자국령에 대한 "계속적인 침략" 등의 구실 하에 무력적 회복을 시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떠한 영유권분쟁에서도 무력사용은 합법화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