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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일본의 영토인식》 사료와 고지도를 통해 살펴본 일본의 경계 인식
  • 윤유숙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이번에 63번째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로 발간된 《전근대 일본의 영토인식》은 전근대(고대·중세·근세)를 중심으로, 일본의 '영토인식 변화'를 통사(通史)적으로 규명하고자 기획되었다. 오늘날 일본은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주변국들과 영토 분쟁을 빚고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본서에서는 일본이 안고 있는 영토 갈등의 근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전근대 일본의 영토인식을 들여다 본다. 인류의 역사상 각 민족은 생존의 공간으로서 영토와 경계를 설정하고 있었고, 이러한 영토와 경계에 관한 각 민족의 관심은 전근대 일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서는 총 4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었다.

고대 율령제 국가 이전의 경계 인식

〈야마토 왕권의 영역 확장을 통해 본 고대 일본의 경계 인식〉(홍성화 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교수)은 고대 율령제 국가 이전의 경계 인식에 관한 고찰이다. 율령국가 이전의 고대 일본에서 영토인식의 문제를 근대적 개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근대의 국경선(경계)이라는 개념보다는 제(諸)세력 간의 세력범위를 통해서 고대 일본열도에 나타나는 경계 인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문헌상 고대 일본의 경계인식을 판단할 수 있는 출발점은 중국사서인 《송서(宋書)》에 실려있는 무(武)의 상표문(上表文)이다. 이를 통해 과거 왜국(倭)이 동서로 세력을 넓혀나가려 했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일본서기》는 율령 이후 일본의 천황주의 사관에 따라 편찬되었기 때문에 야마토 왕권에 의한 고대왕권의 형성 시기를 앞당기고 있으며, 야마토 왕권이 이른 시기에 일본열도를 점유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에타(江田) 후나야마(船山)고분의 대도명문(大刀銘文), 이나리야마(稻荷山)고분의 철검명문(鐵劍銘文) 등 금석문 자료와 《일본서기》의 기사를 재분석해 보면, 당대의 인식 속에서 적어도 6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규슈에서 간토에 이르는 지역을 관할하는 체제로 들어섰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고분과 용봉문환두대도(龍鳳紋環頭大刀) 등 고고학적 유물의 분석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도출할 수가 있다. 즉, 야마토를 중심으로 한 세토내해 일원에 보이는 고고학적 자료가 산음(山陰) 지역 등 동해와 연이은 지역과의 차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고대 이즈모(出雲)지역이었던 시마네현의 경우는 야마토 왕권뿐만이 아니라 한반도와 경계로서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고대 율령체제 성립 이후의 경계 인식

〈동아시아와 일본율령국가의 경계인식〉(송완범 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교수)은 고대 율령체제 성립 이후에 관한 고찰이다. 고대 일본인들의 '경계인식'에 관한 연구에서는 고고학과 역사학의 관점에 입각하여 그 사례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일본의 '경계'가 갖고 있는 총체적인 '경계문화'에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인(毛人)과 변원( )의 사례를 들어 고대국가의 통치 시스템 속에 자리 잡은 화화(華化)와는 전혀 다른 이역(異域)의 존재에 대해 살펴보았다. 예를들어, 사천왕신앙이 본래는 신라의 기도에 의한 항복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나, 807년 이후는 역병, 그리고 869년 오노(小野)산성 내의 사왕원(四王院)의 사례는 아소(阿蘇)산의 화에 의한 역병을 막는 신앙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실제로 군사적인 외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라의 주변으로부터 진입하여 중앙에 역병을 퍼트리는 관념적인 외적을 막는 지역에 사천왕신앙이 필요하다는 의식의 변질이 내재된 것이다. 이러한 사천왕신앙 변화의 배경에는 고대 일본이 자기 지배의 객체를 인식하고 지배의 정당성을 재인식하는 이데올로기인 이른바 '왕토왕민(王土王民)' 사상이 있었다. 결국 사천왕신앙의 변질은 일본의 지배층으로 하여금 왕토를 닫힌 공간으로서의 국토로 생각하게 했고, '예(穢)'가 충만한 이역으로부터 국가영역의 '정(淨)'을 지킨다고 하는 9세기의 전환이 일본 율령국가의 변경 의식의 변질에 영향을 미쳤다고 이해할 수 있다.

중세·근세 일본의 영토인식 연구

중세 일본의 영토인식에 관한 연구는 〈국내외의 고지도로 본 중세 일본의 영토인식〉(김보한 단국대 교수)라는 주제를 선택 하였다. 고대 율령체제에서 '정'과 '예'의 경계관념은 중세에 접어들어 '정'의 중심에는 서국이 있고, 그 주변국에는 동국과 남규슈의 여러 국이 존재하며, 경계영역에는 대마도, 이키와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수의 섬들이 있었다. 그리고 '예'의 이역에는 류큐(琉球)와 고려(조선)가 있다고 인식하였다. 그런데 몽골의 일본 침입 직후에 중세 일본의 관념적 경계인식에서는 '정'의 지역에는 서국, 동국, 규슈를 두고, '예'의 지역에 몽골(고려)을 위치시켜 이분법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중세 일본의 이분법적 경계인식은 중세 일본지도에 잘나타나 있다.

마지막으로 근세 부분은 〈전근대 일본의 『삼도(三島) 영토관』 변화에 대한 고찰〉(신동규 동아대 교수)이라는 주제를 선정하였다. 전근대 일본의 영토인식이 규슈, 시코쿠(四國), 혼슈(本州)와 그 부속도서라고 하는 이른바 '삼도(三島) 영토관'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전제 하에서 고지도를 소재로 삼아 '삼도 영토관'의 시대적 변화를 고찰하였다. 《이노도(伊能圖)》는 19세기에 제작된 막부의 관찬지도로 지도의 상단에 에조치 전체와 카라후토(사할린)의 일부분 및 구나시리토(國後島)가 그려져 있어 지도 그 자체만으로 보면 완전한 '삼도 영토관'의 붕괴를 보이고 있으며, 일본 최초로 '사도(四島) 영토관'이 출현된 지도이다. 하지만 《이노도》는 어디까지나 일반에 공개가 금지된 막부용의 지도였고, 실제로 민간에는 '삼도 영토관'에 입각한 사찬지도들과 장식용 지도들이 에도시대 말기까지 유행하고 있었다.

한편 에도막부 마지막 지도인 《관판실측일본지도(官板實測日本地圖, 1867년)》는 카라후토 전부가 추가되어 있고, 『이노도』에 보이고 있던 구나시리토를 포함해 현재 러시아와의 영토분쟁 지역인 에토로후토(澤捉島)·하보마이군도(齒舞群島)·시코탄토(色丹島) 등도 추가로 보이고 있으며, 실측도로서는 최초로 류큐를 삽입하고 있다. 《관판실측일본지도》는 《이노도》와 함께 일본의 '삼도 영토관' 붕괴의 서장을 열었고, 이후 일본의 영토팽창과 분쟁의 서곡과도 같은 지도였다. 에도막부 붕괴와 함께 전근대 '삼도 영토관'은 메이지 정부의 성립과 함께 '사도 영토관'으로 변화되었다. 즉 중앙에 규슈, 시코쿠, 혼슈를 위치시키고, 상단에는 홋카이도와 쿠릴열도, 하단에는 류큐열도를 위치시키는 규슈, 시코쿠, 혼슈, 홋카이도 중심의 '사도 영토관'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현대에 들어와 일본의 영토분쟁의 근원은 자신들의 영토가 규슈, 시코쿠, 혼슈,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한 부속도서(쿠릴열도, 류큐열도포함)라고 하는 '사도 영토관'으로의 변화에 있었다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본서는 지금까지 통사적으로 고찰되지 않았던 중·근세 고지도를 통한 영토인식의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하였으므로, 일본 영토인식에 관련된 기초사료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기대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근·현대 시기에 동아시아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본열도 주변의 영토문제의 근원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