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의 최대 갈등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독도, 과거사 마찰은 새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 하에서도 불가피하게 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전후(戰後) 세대 일본인들은 과거 식민통치와 침략의 역사에 대한 속죄 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고 이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한다. 따라서 이들은 과거사 문제에 관해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을 취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더욱이 이들은 과거사(독도문제 포함) 문제가 한일관계에서 갖는 폭발성이나 민감성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무신경한 경향이 있다. 반면, 한국 국민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고 과잉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
한일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 정부의 대응법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매년 2월 22일에는 이른바 '다케시마의 날'행사, 3월에는 교과서 검정을 행하고 외교청서, 방위백서에서의 독도 기술을 연례행사로 강행하고 있다. 일본의 어느 지도자도 관행처럼 해오는 이 행사들을 전격 취소하거나 변경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익적 성향이 강한 아베 총리는 이 행사들을 그만두기는 커녕 더욱 강성으로 밀어붙이거나, 또는 '도발'의 수위를 높일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작년 총선을 앞두고 그는 1993년 '고노 담화'를 수정하거나 후퇴시키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약함으로써 악명을 드높인 바 있다. 이러한 도발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수수방관하거나 온건한 대응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정권에 따라서 다소의 강약 차이는 존재하지만 한국의 어느 역대 정권도 예외 없이 일본의 과거사 인식문제, 독도 도발에 대해서는 초강경 대응을 추구해왔다. 한국의 초강경 대일정책은 과거사 쟁점을 상승작용 시키는 정치권-매스컴-여론으로 구성되는 트라이앵글의 존재로 설명된다. 즉, 일본에서 과거사 문제가 발원하여 외교 쟁점화 되면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경쟁적으로 초강경 대응을 주문한다. 매스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보수진보를 떠나 미디어는 일본의 도발을 비난하고 분개하는 민족주의적 언설과 담론을 쏟아낸다. 국민여론도 반일정서를 격정적으로 표출한다. 인터넷의 각종 사이트는 반일정서로 들끓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강경하고도 단호한 대일 정책을 취하게 된다. 특히 민주화 이후 정부가 국민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사 문제에 관한한, 한국 정부가 나름의 자율성과 유연성을 발휘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지금 한일관계가 놓여있는 객관적인 상황
1990년대 이후 한일관계는 우호-협력(온탕)과 대립-갈등(냉탕)을 주기적으로 반복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한일관계의 '온탕-냉탕' 사이클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정권 초기에는 미래지향적 대일협력 관계 수립을 내세우지만, 어느 정도 시기가 경과하게 되면 일본에서 과거사(독도) 관련 도발이 발원하게 됨에 따라 대일정책을 초강경 방향으로 선회시켜 전면적인 관계악화로 빠지게 된다. 결국은 악화된 한일관계를 소강상태로 유지하거나 관계복원의 길을 모색한다. 박근혜 신정부에게 대일관계의 이러한 사이클이 적용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작년 이명박 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방문과 '천황 발언' 이후 일본 내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최저 상태로 떨어졌고, 한일관계는 사실상 2000년대 이래 최악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냉각되어 있다. 더욱이 위안부 문제에 관련한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 전후보상 문제와 관련한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한국 정부의 대일 외교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유연성을 발휘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의 대일외교는 일본과의 적극적인 새로운 협력을 모색하고 우호의 공간을 넓히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독도, 과거사 문제 등의 악재가 표면화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조절하는 최소한의 접근(Minimum Approach)에 머물기 쉬울 것으로 예상된다. 아베 정권 또한 한국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정책 패키지를 내놓기는 매우 어렵다. 아베의 정치적 DNA는 한마디로 우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 안전보장, 역사인식 문제에 관해 그의 성향은 대다수 한국인이 바라는 방향과는 상극의 언행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작금의 한일관계가 놓여있는 객관적인 상황이다.
가칭 '한일 역사화해를 추진하는 공동기구' 조직의 필요성
한일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차이나 독도문제에 관한 상반된 입장을 고려할 때 앞으로도 양국 간 역사-독도 마찰의 빈발은 불가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찰을 해결할 수 있는 단기적 묘안이나 해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제들은 양국 간 국민감정의 충돌만을 초래하여 양국관계 전반의 악화로 파급되기 십상이다. 이렇게 볼 때 양국 간 역사마찰의 해결은 결국 장기적인 관점에서 추구될 수밖에 없다. 양국 국민의 역사인식의 상위가 역사 마찰의 궁극적인 원인 제공자라고 본다면, 결국 마찰의 해결 또한 역사인식의 변화를 통해서 추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어느 일국이 타국에게 역사인식의 합치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에 걸쳐 진행된 바있는 '한일 역사공동위원회'의 활동은 의미가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학술적인 공동연구를 통해서 역사인식의 차이를 서로 확인하고 그를 통해 상호 이해를 촉진시키는 것은 역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일관계에서 난마처럼 얽혀있는 과거사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 양국의 민간전문가 및 관계자로 구성되는 가칭 '한일 역사화해를 추진하는 공동기구'를 조직하여 위안부, 전후보상 등 과거사 현안에 대한 합리적인 해법 모색을 위한 공동연구를 수행토록 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 기존의 '한일역사공동위원회'가 역사학자들에 의한 공동의 역사연구 조직이었다면, 여기서 제안하는 공동기구는 보다 확장된 분야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정책입안적 성격을 띤 기구가 될 것이다. 이 기구에는 역사학, 정치학, 한일관계 등 분야의 전문가는 물론, 정대협과 관련 시민단체의 대표 그리고 변호사 단체, 헌재, 대법원이 추천하는 법조계 인사 등이 포함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처럼 양국의 대표 10인+10인으로 하여 약 20인으로 구성되는 공동기구를 양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조직하여 2015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까지 약 3년간을 기한으로 하여 한일의 역사화해를 위한 지혜를 모아 합리적인 해법을 도출토록 하고, 그 기간 중에 양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를 사실상 금지하고 오직 경제, 안보, 문화 등 여타 정책영역에 전념토록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기구가 3년 후 양국정부와 국민이 박수갈채를 보낼 수 있는 해법이 도출될 수 있을지는 기대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훌륭한 결론이 나오든 나오지 않든, 좁은 국익이나 국내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양국 및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와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입장에 서서 민간, 시민사회, 학계의 인사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지혜와 총의(總意)를 모으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여러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된다. 양국의 역사마찰을 합리적으로 관리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양국 최고 지도자 간의 암묵적인 합의와 공동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즉, 양국의 지도자 스스로가 역사마찰로 인해 양국관계가 훼손되고 국민감정이 악화되는 것이 양국의 국가 이익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확고할 때 역사마찰을 진정시키기 위한 공동 노력에 나서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양국 지도자 간의 신뢰와 그에 기반 한 대화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인권,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가치 공유야말로 공동체 건설의 출발점
역사인식의 변화를 추구하는데 효율적인 방법은 국가가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는 시민사회나 민간 차원의 학문적 대화나 교류를 통한 해법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역사 문제는 배타적인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의 논리로 해결되기 보다는 보편적인 가치와 규범을 추구하는 시민사회의 논리에 의해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 효과적 일 수밖에 없다. 국경을 넘어선 시민사회 간의 연대는 문제를 풀어 가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한일관계는 아시아의 어느 양국 관계 못지않게 다층적인 관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지방자치체, 시민사회, 기업, 지식인 간의 다층적 교류와 협력은 근년 들어 눈부시게 진전되고 있음이 확인 된다. 이러한 다층적 교류협력은 한일 간 관계의 개선에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역사마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인 일본은 겸허해야 하고 피해자인 한국은 역사적 화해를 위한 관용이 요청된다. 이와 더불어 한일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미래지향적인 관점이다. 무엇보다도 한국과 일본은 정치적으로는 인권과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공유하는 아시아의 중심적 국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기본 가치의 공유야말로 이 지역 공동체 건설을 지향하는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