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은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의 《사할린 섬》이라는 번역서를 발간하였다. 그 동안 러시아 대문호 체호프는 세계적으로 절정의 수준을 보여준 단편소설 작가로 국내에 알려졌다. 그런데 체호프는 1890년 시베리아와 사할린 섬을 여행한 후 소설책이 아닌 현장보고서 《사할린 섬》을 남겼다. 이번에 국내 최초로 번역된 《사할린 섬》은 역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체호프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와 일본의 사할린과 쿠릴 열도(일본의 소위 '북방4개도서' 포함)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사할린 섬》은 체호프 작가 세계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였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본서는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가 바라본 시베리아와 사할린 섬 및 체호프 자신의 작가 세계의 변화가 조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러시아 대문호 체호프의 사할린 탐방기
체호프는 1890년 4월 21일 모스크바를 출발, 4월 29일 예까쩨린부르크(Екатеринбург)에 도착했다. 그는 시베리아를 횡단한 뒤 7월 11일 사할린 섬에 도착했다. 그 후, 10월 13일 사할린 섬을 출발하여 12월 8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는 사할린 섬 여행 이후 1893년 10월부터 1894년 7월까지 〈러시아사상(Русская мысль)〉에 《사할린 섬》을 연재하였다. 1895년 《사할린 섬》은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사할린 섬》은 390여 쪽의 현장 보고서였고, 전체 23장으로 구성되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제1장부터 3장까지는 체호프의 니꼴라옙스크에서 아무르강 하구까지 여행과정, 사할린 도착 과정, 사할린 유형수(流刑囚)의 조사 등이었다. 4장부터 11장까지는 사할린 알렉산드롭스크 지구의 유형수와 농민, 아이누인과 길랴크인의 역사 등이었다. 12장에서 14장까지는 체호프의 남사할린 조사, 러시아의 사할린 영유권 역사 등이었다. 15장에서 23장까지는 사할린 유형수 주민의 구성, 여성문제, 유형수의 가족생활, 유형수의 도덕성과 범죄성 등이었다.
체호프, 문헌수집 및 현장조사에 기초한 《사할린 섬》 완성
체호프는 사할린 섬 방문을 전후한 문헌수집 및 현장조사를 토대로 4년 만에 《사할린 섬》을 완성하였다. 《사할린 섬》을 최초로 국내에 번역한 배대화 경남대 교수에 따르면 "체호프는 사할린 섬 여행 이전에 러시아형법, 금고와 유형, 사할린 관련 자료 등을 조사했다. 그는 중앙형무소 당국의 보고서, 통계문헌과 해양선집 등을 연구했다. 체호프는 여행 기간 중 저녁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여행관련 기록도 정리했다. 체호프는 유형수의 삶을 조사하기 위해서 마을마다 모든 집을 돌아다니려고 노력했다. 체호프는 집주인 부부, 가족, 동거인, 일꾼 등을 직접 기록했다. 체호프는 사할린 섬을 작성하기 위해 다양한 참고문헌을 조사했다. 참고문헌을 살펴보면 체호프는 사할린 섬에 대한 학술지, 즉 광산저널, 해양총서, 역사통보 등의 다양한 문헌을 활용했다."
러시아와 일본,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 영유권 문제
체호프는 러시아와 일본의 남사할린 영유권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체호프에 따르면 일본은 1613년부터 처음으로 사할린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측량기사 마미야 린조(Мамиа Ринзо, 間宮林藏)는 1808년에 사할린 서쪽 해안을 따라 여행했고, 처음으로 사할린이 섬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체호프는 남사할린의 포유류 중 강치를 주목했다. 체호프에 따르면 사할린의 해안 가까이 바다 위로 암벽이 홀로 솟아 있는데 "위험한 바위(Камнем Опасности)"로 불렸다. 한 목격자는 범선 예르마크(Ермак)를 타고 이 바위를 탐사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바위까지 아직 2.4미터나 남았다. 그런데 바위는 커다란 강치들로 빽빽하게 덮여 있었다. 이 무수한 야생의 무리들의 울음소리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 짐승들은 전설처럼 커서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바위처럼 보였다. 강치의 크기는 약 4미터 정도 혹은 더 컸다." 이러한 사실은 강치가 19세기 후반 동해의 독도인근 해역뿐만 아니라 사할린 섬 해역에도 넓게 분포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1875년 러시아와 일본은 남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양국의 경계로 확정하는 뻬쩨르부르크조약을 체결했다. 체홉은 러시아가 쿠릴열도(Курильские островы) 전부를 일본에 넘겨준 것을 비판했다. 체홉은 쿠릴열도의 양도 때문에 "일본에게 매년 100만루블의 소득을 넘겨주었다"며 쿠릴열도의 경제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체호프는 일본인이 사할린을 최초로 탐험했고 처음으로 남사할린을 점령한 것을 인정했다. 이 책의 해제를 작성한 필자가 보기에 체호프는 사할린의 발견에 대해서 러시아보다 일본이 앞섰다고 기록했지만, 실제 러시아는 이미 17~18세기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정보를 갖고 있었다.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1700년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레메조프(С.У. Ремезов)는 자신의 시베리아 지도에 쿠릴열도를 표시했다. 1779년 4월 30일 예까쩨리나 2세는 <어떤 세금도 내지 않는 러시아의 신민이 된 쿠릴열도 주민>에 대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체호프가 사할린을 방문한 이유
그런데 왜 체호프는 왜 시베리아와 사할린 섬을 방문했을까?
시베리아와 사할린 여행은 체호프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체호프는 1892년 3월 모스크바 남쪽에 인접한 멜리호보(Мелихово)에 정착했다. 그는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체호프는 콜레라가 유행할 때 의사로서 일했고, 굶주린 농민을 구제했고, 학교 건립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체호프는 여행 중 자신의 인상을 담은 '구세프(Гусев, 사람이름)'를 집필했다. 그밖에 '6호실(Палата No.6)', '유형지에서(В ссылке)', '살인(Убийство)', '공포(Страх)' 등이 있었다. 이 작품들의 핵심은 힘과 위선에 대한 투쟁과 단순함이었다. 체호프는 '위안'을 얻으려고 시베리아와 사할린 여행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했다. 그 위안은 잠시 시베리아라는 이국적인 자연에서 자신의 현실적 고민들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러시아 사회에서 사할린 섬의 필요성에 대한 체호프의 고민이었다. 체호프는 러시아 식민지의 모습 및 유형수에 대해 관찰했다. 여기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체호프의 결정이었다
체호프 소설의 전환은 사할린 섬이었다. 체호프는 1890년 시베리아와 사할린 섬 여행 이후 인간본질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권력에 의한 우연성이 인간의 삶을 철저히 굴복시키는 상황을 주목했다. 그는 작가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그는 사할린 여행 이후 작가가 민중의 삶에 기초해야한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현실의 삶은 체호프에게 무거웠다. 체호프는 《사할린 섬》을 통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은 현실의 삶과 꿈꾸는 삶의 이중성으로 고통 받는다. 작가는 현실의 삶과 꿈꾸는 삶의 이중성을 동시에 투영해야 한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