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마네현(島根縣)이 지난 2월 22일 여덟 번째로 이른바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 행사를 가졌다. 이번 행사에는 내각부의 '해양정책·영토문제 담당 정무관'이라는 정부 고위관계자가 처음으로 참석했다. 국회의원도 의원을 겸하는 정무관을 포함하여 역대 최대 규모로 20명이나 참석했다. '다케시마'는 어디인가? 물론 우리 땅 독도다. 일본이 '이제부터 독도는 다케시마'라고 한 때는 1905년 러일전쟁 중이었다. 그 전까지 일본은 독도를 '마쓰시마(松島)', 또는 '양코도'라 불렀다. 일본 정부는 왜 독도에 '다케시마'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다케시마'라는 이름에 뭔가 진한 미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본은 '다케시마'라는 이름에 특별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이 갖고 있는 '다케시마' 명칭의 특별한 역사
17세기 말 한일 양국은 울릉도를 둘러싸고 영유권 논쟁을 벌였다. 우리 역사는 이 사건을 '울릉도 쟁계(鬱陵島爭界)'라 하고, 일본에서는 '다케시마 일건(竹島一件)'이라 한다. 당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불렀던 것이다. 1696년 3년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일본 정부는 '다케시마(울릉도)는 조선의 것'임을 인정했다. '울릉도는 조선에 가깝고, 일본에 부속된 적도 없으니, 한일간 우호를 고려하여' 내린 판단이었다. 일본 에도막부(江戶幕府)는 마을마다 "'다케시마(울릉도)' 도해(渡海)를 금지한다"는 경고판을 내걸었고, 1837년에는 울릉도에 몰래 들어가 어업한 '하치에몬'이란 자를 사형에 처하는 일까지 있었다. 1877년 일본 메이지(明治)정부의 최고 기관인 태정관은 1696년의 결정을 기억하며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지령까지 내렸다. 그런 '다케시마'에 조금씩 변고가 생기기 시작했다. 1876년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강제한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울릉도에 잠입하여 무단 벌목을 자행했다. 어떤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새롭게 발견한 섬인양, 개척 청원을 내기도 했다. 1880년 일본 정부는 아마기호라는 군함을 파견하여 울릉도 사정을 직접 조사했다. 그 조사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의 영토로서 진짜 '다케시마'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예로부터 '대나무 섬'이라 하여 '대섬' 또는 '죽도'라 하는 섬인데, 울릉도의 저동 마을 앞바다에 있다. '죽도'(대섬)는 일본어로 읽으면 '다케시마'다.
이웃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다케시마'에 집착하는 일본
1900년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군수는 '울릉도, 죽도(대섬), 석도(독도)'를 관할할 것을 명한 바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3섬 모두가 일본 역사에서 '다케시마'로 불렸거나, 억지로 이름 붙여졌던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 침탈전쟁인 러일전쟁 종전 100년이 되는 해에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고, '종이 상의 조치(paper acts)'에 불과했던 이른바 '독도 영토편입' 조치를 내세우며 여론을 조장하고 있다.
'다케시마의 날'을 선동하는 이들에게 '다케시마'는 과연 독도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때 일본은 옛 '다케시마(울릉도)'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바가 있다. 1947년 일본 외무성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주도하던 미국 국무성 앞으로 홍보자료를 보내어 옛 '다케시마'(울릉도)와 새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해줄 것을 유도했다. 그러나 '다케시마 외 1도'(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스스로가 이미 17세기 말에 포기를 했던 것이며, 19세기 말에도 거듭 그 사실을 확인했었다.
그런데도 일본에는 '다케시마의 날'을 통해 '다케시마'에 대한 허상(虛像)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만고의 이웃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언제까지 '다케시마'에 집착할 것인가? '다케시마는 조선의 것'이라 했던 그 선조들의 현명한 처사를 현 세대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망상(妄想)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