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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서술된 3·1운동
  •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동경서적 《새로운 사회 역사》 교과서(2012)의
3·1운동 기술 부분

올해는 3·1운동 94주년이다. 뜻 깊은 3·1절을 맞이하여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3·1운동이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먼저 현재 일본 중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역사교과서는 2011년에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것이다. 여전히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기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채택률은 우리들에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높은 채택률을 보인 교과서는 동경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이다. 52.8%로 67만 9038책이 사용되고 있다. 그 뒤를 교육출판(14.6%), 제국서원(14.1%), 일본문교출판(12.6%)이 잇는다. 그 뒤를 잇는 5위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계열에서 만든 교과서가 차지했다. 즉 육붕사(育鵬社, 후지 산케이 그룹)의 《중학 사회 새로운 일본의 역사》가 3.7%로 4만 7812책을 차지했다. 2009년에 비해 6배의 증가율이며 2001년의 0.097%에 비하면 38배 정도의 신장세를 보인 것이다. 이렇게 육붕사의 교과서가 약진한 데에는 도쿄 인근의 가나가와(神奈川) 현에서 일괄적으로 이 교과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지역 170개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다. 6위를 차지한 것은 청수(靑水) 서원의 《역사-일본의 역사와 세계》로서 2.1%로 2만 7248책을 차지했다.

3·1운동의 실상과 그 의미를 축소평가하려는 의도 역력

이들 교과서의 성격은 어떠할까? 2011년 역사교과서 채택이 결정될 무렵에 육붕사 측에서는 "특히 동경서적과 청수서원의 책이채택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선동했던 점을 주목하고 싶다. 육붕사는 이들 두 교과서가 시대착오적인 계급투쟁사의 색채가 강하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점을 참고하면서 이들 교과서에서 3·1운동이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동경서적 《새로운 사회 역사》
교과서(2012)

먼저 도쿄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는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조선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지향하는 지식인과 학생 등이 서울에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문장을 발표하고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데모 행진을 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아 독립운동은 단기간에 조선 전지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3·1 독립운동) 조선총독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는 한편, 그동안의 무단적인 지배를 완화하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조선의 근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라고 되어 있으며 3·1운동에 관한 사진 자료는 전혀 게재되어 있지 않다. 박스 기사로 '인터내셔널리스트 야나기 무네요시'가 소개되어 있다. 2006년판에는 관련 사진으로 조선의 도자기가 인용되었는데, 2012년판에는 도자기와 함께 야나기 무네요시의 노년의 인자한 모습을 함께 실었다. 야나기에 대한 기술이 지면의 절반을 차지고 하고 있어서 3·1운동의 실상 보다는 조선에 호의적이었고 조선의 전통미를 발견해 주었다고 하는 야나기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구성이다. 한편 3·1운동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채택률이 육붕사에 밀린 청수서원의 교과서에는 <민족운동의 고양>이라는 절 아래에 '3·1 독립운동'이 위치한다.

청수서원 역사교과서 표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당하고 강압적인 정치가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은 저항을 계속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 중심부의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민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규모의 데모를 거행했다. 독립을 지향하는 민중의 집회나 데모는 조선 전토로 확산되어 각지에서 경찰, 군대와 충돌했다(3·1운동의 실상과 그 의미를 축소평가하려는 의도 역력1독립운동). 이 과정에서 무저항의 조선 민중이 살해되거나 잔학한 고문이 가해지기도 했다.

라고 서술했다. 3·1운동에 대해서 일본의 교과서 중 가장 사실에 가까운 기술을 한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학습과제에 대해서도 "식민지 지배가 계속된 지역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을까? 사람들의 요구에 주목하자"라고 하여 식민지를 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교과서의 집필진에는 도쿄대의 미타니 히로시(三谷博, 일본사)와 한국인 강제연행 등을 연구하고 있는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런데 이전의 교과서와 비교하면 보충자료는 대폭 축소되었다. 즉, 2006년판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항목에 맥켄지가 촬영한 의병 사진, 3·1운동이 발생한 지역을 표시한 한국 지도,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파고다 공원의 3·1운동 부조물이 인용되었는데 2012년판에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파고다공원(탑골공원) 팔각정 사진과 3·1운동 부조물만이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이쿠호샤 역사교과서 표지

일본교과서의 식민지배 관련 기술을 보완할 수 있는 우리의 대처 필요

한편, 육붕사의 교과서에는 <베르사이유 조약과 국제협조 동향>이라는 절 아래 '아시아의 민족운동'이 위치하고 3·1운동이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5·4운동 아래에 위치하여 5·4운동 다음에 3·1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오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술 내용은 "조선에서도 일본으로부터의 '독립만세'를 외치는 대규모의 데모행진이 서울에서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3·1독립운동). 조선총독부는 군대의 힘으로 진압했지만, 이후 무력으로 억압하는 통치 방법을 고쳤습니다"라고만 하여 매우 간략한 서술이다.이미지로는 3·1운동 당시 여학생 시위 모습을 실었다. 3·1운동의 실상과 그 의미를 축소평가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가장 많은 채택률을 보인 도쿄 서적의 3·1운동 기술도 사실에 대한 정확한 교육보다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활동을 통해 식민지배의 잔학성을 얼버무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여 육붕사가 이 교과서를 급진적인 교과서라고 평가하는 부분에는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청수서원 교과서도 관련 기술이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 게다가 이를 우익 교과서가 제쳤다는 점이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한국 관계기관의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