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의 우경화가 가속화되면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번 《동북아역사재단 뉴스》에서는 일본사 전공 제1세대인 김현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 일본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문제들과 시사점, 그리고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을 들어보았다. 대담 진행은 동아시아 외교사 전문연구자인 김민규 동북아역사재단 홍보팀장이 맡았다. _ 편집자 주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 대학원에서 일본사 연구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고려대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고려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광교포럼 지도교수, 동북아역사재단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와 논저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근간 예정), 《김현구 교수의 일본이야기》(1996), 《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1985) 등이 있다.
김민규 동북아역사재단 홍보팀장
역사학박사(UCLA). 동아시아 외교사를 전공하였으며 일본 동경대 대학원 외국인연구원을 역임하였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근대 일본 및 동아시아사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담당하며, 독일학자들이 집필하여 독일학생들이 사용하게 될 《동아시아사 부교재》 감수를 총괄하였고 현재는 동북아역사재단 홍보팀장으로 재직중이다.
Q 김민규 교수님께서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일본사 전공 제1세대'로 이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한국인이기도 하다. 일본사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와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A 김현구 고려대에 입학했던 1965년은 한일회담반대운동으로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던 해였다. 중국사를 전공한 지도교수가 마침 "우리나라에는 중국사보다 일본사 연구자가 필요한데 일본사 전공자가 한 사람도 없다"며 "김군이 시작해보라"고 권유했던 것이 가장 큰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사를 선택했다. 그런데 석사를 준비하다 보니 기존 자료가 전혀 없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당시 6년째 교직에 몸담고 있었는데 사표를 내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연구생으로 2년을 지내고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만학이었던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Q 김민규 어려움이 컸으리라 예상된다. 유학 당시의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A 김현구 당시 동전을 넣어 사용하는 세탁기라든가 기타 생활면에서는 유학생에게 편리한 시설, 제도들이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어서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다. 문제는 학문적인 측면이었는데 일본사 자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어떤 과제를 연구해야 할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연했다. 기존에 발표된 논문과 책들을 구해 읽어보니 너무도 정밀해서 일본 학문의 벽은 높고도 두텁다는 것을 절감했다. 처음에는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절망감도 느꼈다. 지금도 그때의 심정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일단, 지도교수인 미즈노 유(水野 祐) 교수의 연구서적을 읽으며 길을 찾았다. 미즈노 교수는 '삼왕조 교체설'을 주장하며 일본의 정통사학과는 대칭적인 측면에 있던 독특한 사람이었다. 미즈노 교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과정에서 어렴풋이 무엇을 해야할 지 느끼게 됐다. 높고도 두터운 학문의 벽 앞에서 내가 가야할 길을 찾기까지가 유학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다.
Q 김민규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사관(史觀)이 다를 수도 있고, 그 다른 사관을 드러내기도 힘들었을 텐데, 한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일본사에 대한 일본 학생들과 교수들의 거부반응은 없었나?
A 김현구 그런 면에서는 와세다대학을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동경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역사학계의 학풍은 체제 옹호적인, 과거의 전통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학풍이었으나, 와세다대학에는 비판적인 학풍이 있었다. 그래서 정통사학에 대해 비판적인 발표도 수용되고 심지어 칭찬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박사학위 논문에서 지도교수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지도교수가 "논리적으로 자기주장이 맞으면 정당한 것이기에 김군은 나와 생각이 다르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정당하다"고 평을 하기도 했다. 그런 학풍이 있었기에 용기를 얻어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 부분은 와세다대학에 고맙게 생각한다.
Q 김민규 유학 생활 등을 토대로 저술한 《김현구 교수의 일본이야기》가 공전의 히트를 쳤는데, 당시 이 책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된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A 김현구 일본에서는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쉽게 풀어 책으로 펴내는 예들이 많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면 내 전공을 쉽게 써서 알리며 대중들의 역사인식 향상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됐다. 평소에 메모를 하면서 유학경험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특성을 제시하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 역사적으로 풀어가야겠다고 구상했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일본 경제가 세계를 석권하면서 일본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아졌다. 이에 한국인들이 일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소 구상해오던 것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과 맞아 떨어져 베스트셀러도 되고 좋은 반응을 얻었던 것 같다.
Q 김민규 상당히 많은 제자들을 배출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일본사 전공 제2세대들을 배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A 김현구 나는 고려대에서 25년 정도 재직했는데 그 곳에서 맺은 인연만 제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985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일본에서 일본사를 공부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을 불문하고 일본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 생각하며 조언을 해주었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자면, 언제인지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5개 대학의 대학원 수업을 통합해 고려대에서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다. 대학마다 일본사 과목을 개강할 수 없었기에 떠올린 방안이었다. 당시 학위를 막 마치고 온 제자들에게 두 번씩 강의를 하게 했고 그렇게 한 학기를 마무리 했다. 당시 강의를 한 선생 중에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인 이훈선생도 있었다. 그 밖에 많은 후배들에게 조언을 전하고 또 유학에 필요한 추천장을 써주고 소개도 했다. 이렇게 일본사 전공 제2세대들과는 두루 인연을 맺어왔다고 생각한다.
Q 김민규 고대사가 전공인데, 고대사 하면 떠오르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란 과연 무엇인지? 임나일본부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설명해 달라.
A 김현구 임나일본부만을 전공한 것은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 문제를 중요하게 언급하게 됐다. 사실, 임나일본부 문제를 다루지 않고 일본 고대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일본 고대사 전체가, 또 한일관계사 전체가, 어떤 면에서는 한국 고대사의 틀까지도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한국에서 임나일본부 문제가 다뤄지는 모습을 보면 자주 답답함을 느낀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은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지배 기구로써 '임나일본부'라는 기구를 두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임나일본부설인데, 한국 학계에서는 귀착점을 임나일본부, 그 존재의 유무에 두고 있기도 하다. 임나일 본부라는 기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또는 그것이 외교기구였는지 무역기구였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시 말해, 본질은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주장인데 "한반도를 정말 지배했느냐"하는 논의는 배제한 채 임나일본부라는 기구의 유무, 기구의 성격에 관한 논의만 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한반도 남부에 와서 활약한왜의 성격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연구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주요 현안 중 하나가 역사교과서 문제라고 알고있다. 그 역사교과서 문제의 핵심이 임나일본부 문제인데 이런 문제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것 같아 안타깝다.
Q 김민규 일본 학계에서조차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에 대한 의견은?
A 김현구 그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일본은 과거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주장했던 임나일본부설을 지금도 통설이라고 생각한다. 그 설을 전제로 한 일본 고대사의 틀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데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663년의 백촌강의 전투를 일본이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 소위 '고대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도 부동의 정설이다. 한반도 남부까지를 지배하는 '소제국 일본'과 '당'이라고 하는 대제국이 싸우는 '고대의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는 소제국이라는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의 전제가 된 것이다. 현재 일본 역사교과서를 보면 표현을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통설이 있다고 게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반도로 나아가 임나를 근거로 활동을 했다"고 표현한다든가 "한반도에 가서 임나를 근거로 백제,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에 대항했다"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이것은 한반도를 200여 년 간 지배했다는 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이 이미 없어졌다고 착각하고 있다. 일본 고대사 전체 틀을 알면 이러한 일본인들의 뜻을 모를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동북아역사재단이 나서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Q 김민규 동감한다. 그들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기초 연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대사 이야기로 시작됐지만 이 부분은 근현대사와의 접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 조금 더 설명해 달라.
A 김현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2년 한반도에 쳐들어왔을 때에도 그네들의 의식 속에는 예전에 '경영'을 한 적이 있는 구토(舊土)에 대한 '회복'이라는 의식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가 과거에 우리 것이었으니까 그 한반도를 되찾으러 왔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 했을 때도 과거 한반도가 우리 것이었기 때문에 되찾는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과거에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설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정리되지 않는 한, 만약 앞으로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에 쳐들어온다면 그때도 바로 임나일본부설이 명분이 될 것이다. 임나일본부 문제는 현재의 문제이고 미래의 문제이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문제로 치부해버리고 소홀히하면 결코 안 된다.
Q 김민규 현재 일본사 혹은 한일관계사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 한국인 학자들이 안고 있는 공통된 문제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또, 어떻게 해야 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까?
A 김현구 일본사 연구자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연구도 다양해졌다. 과거에는 국가적 관심분야가 주로 연구 됐지만 지금은 본격적으로 일본사 속에 들어가 일본사 자체에 필요한 연구들을 검토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하나, 무엇을 연구하든 일본 역사 전체의 큰 틀을 보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틀 중 우리가 굉장히 조심해야할 것들이 많은데 그것을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부분적인 데 매몰되다 보면 일본인들이 만든 큰 틀의 일부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합리화 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또 결코 의도한 것도 아니지만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명심하고 전체를 보며 연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제는 우리 시각에서, 우리의 틀로 일본사를 쓸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충분히 그럴 정도로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이 작업을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체가 돼서 추진했으면 좋겠다.
Q 김민규 최근 일본 아베 정권의 급격한 우경화 등으로 인한 한중일 동북아시아 국가간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오늘날 국가 혹은 민족적인 차원에서 현재 한국과 일본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해결 방안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A 김현구 최근 아베 정권의 극우화 현상은 그 바탕을 잘 이해해야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들이 공산화를 염려한 미국에 의해 그대로 석방돼 전후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지도자가 됐다. 그러니 그 후손들이 2차 세계대전 때 주변 국가를 침략했던 사실이라든가 한반도를 지배했던 사실에 대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잘못됐다고 얘기하거나 사과하면 자기 자신,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사과는 하고 있지만 그건 절대 그들의 본심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일본인들을 대해야 한다. 그것을 간과한 채 일본인들이 극우로 치닫고 있다고만 생각하면 결국 정답을 얻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야기지만 오늘날 세계를 이끌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EU공동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인종, 종교, 지역, 경제 등의 문제로 싸워왔는데 EU는 적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의 보편적인 사고를 향해 또 하나의 공동체를 향해 가고 있다. 물론 얼마가 걸릴지도 모르고, 후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가고 있다. 한중일, 우리 동북아시아도 결국 그런 방향으로 가리라고 본다.
한중일 세 나라의 무역 관계를 살펴보면 거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은 GDP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85%이고 무역 상대국 중 1위가 중국, 2위가 일본이다. 중국, 일본에게도 한국은 무역 상대국 3위 내에 드는 단일국가다. 이 세 나라가 굉장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를 바탕으로 하나의 지역협력체, 공동체를 향해 가리라고 본다. 다만 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사고를 가져야 하는데 지금 세 나라가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특히 중국과 일본은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다. 거기서 모든 문제가 빚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를 탈피하고 보편적인 사고를 향해서, 하나의 공동체를 향해서 노력하는 것이 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렇게 갈 것이며, 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Q 김민규 퇴임 후 현재 진행 중인 일과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A 김현구 현재 기존에 완성해놓은 논문, 〈동아시아 세계와 백촌강 싸움〉을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앞으로는 그동안 연구해온 것들을 쉽게 풀어내는 작업들을 하려고 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읽고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을 펴내고 싶다. 특히, 한중일 관계 속에서 한국이 어떤 길로 갈 것인지, 동아시아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생각하며 함께 길을 찾을 수 있는 책을 펴내고 싶다.
Q 김민규 교수님께서는 동북아역사재단 이사로 재임 중이다. 재단의 이사로서, 또한 한일관계사 분야의 대표적인 전문연구자로서 재단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A 김현구 동북아역사재단에 크게 3가지 과제가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일본과의 역사교과서 및 일본군 '위안부' 문제, 중국과의 동북공정 문제, 독도와 동해표기 문제. 이렇게 3가지 중 2가지가 일본과의 관계이다. 비중이 큰 만큼 연구의 양과 질에도 더욱 신경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재단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오랫동안 정책대안기관으로 갈것인가 연구기관으로 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이 많았다. 다행히 현재는 연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개인적으로 동북아역사재단도 좀 더 연구기관화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책대안 제시도 전혀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다만 연구와 정책에서 비중을 연구 쪽에 둬야, 그 중에서도 현안보다는 기초연구에 둬야 결과적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고 미래에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초적인 연구가 탄탄해야만 좋은 현안 연구도 이뤄질 수 있고, 좋은 정책대안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