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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역사의 아픔을 넘어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꿈꾸며
  • 탁송철 창녕 남지고등학교 교사

이번 동아시아사 교원들의 중국 현장 연수는 매우 기대되고 가슴 벅찬 설렘으로 다가왔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여는 주도적인 씨앗이 되라’는 시대적 소명을 절감하며,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 역사교훈여행)의 좋은 기회를 맞았기 때문이다. 2월 20일(수)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약 10만 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남경 시립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이어 중화문을 답사하게 되었다. 중화문은 도시 방어를 위해 네 겹으로 만들었고, 정교하고 복잡하며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중화문 주위 진회하(秦淮河)의 야간 등불을 감상하니 명나라 시대에 와 있는 착각이 들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평화교육의 필요성

이튿날 평화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남경 사범대학 부속 중학교를 방문하였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평화 교육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필요함을 이 학교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어 호가화원을 가보았다.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을 도운 호대해(胡大海)의 넓디 넓은 화원이었던 호가화원에 독립군을 양성하던 군사학교터가 있었고, 바로 근처에 동진시대부터 있었던 고와관사(古瓦官寺)라는 절은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원 비밀기지였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그분들을 생각하며 찬 기운이 뼈 속을 스쳐 지나감을 느낀다.
다음에 도착한 곳은 남경대학살 기념관이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 일본군에 의해 수많은 중국인이 희생되었다. 기념관 입구의 부조에서 그 참혹함을 느낄 수 있으며, 뼈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곧 이어 도착한 곳은 동명학원 터였다.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으로 독립을 얻고자 한 안창호가 1924년 중국 남경에 세운 학교이다. 안내판 하나 없어 찾기도 어려웠다. 후손들의 관심이 요구되는 곳이다.

현장 연수 3일째, 남경 남문에 위치한 천비전(天妃殿), 정해사(靜海寺), 열강루(閱江樓)를 탐방하였다. 천비전은 물의 신이며 어머니인 천비를 모신 사당인데, 아주 옛날부터 상인 등이 무사 항해를 바라며 이곳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어 사자산 정상의 ‘열강루(閱江樓)’에 올라보니 양쯔강과 남경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현대 중국의 자부심, 순수 자국 기술의 상징 장강대교가 가로질러 보인다. 정화 함대의 안전을 항해를 위해 제를 올렸던 곳인 정해사 옆 건물은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바로 중국이 1842년 아편전쟁에 패한 후 영국과 맺은 굴욕적인 난징조약 체결지이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장면인 것이다. 곧 이어 주은래(周恩來) 기념관(매원신촌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주은래는 1946년 5월부터 1947년 3월까지 국민당 정부와 협상을 진행했다.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위해 적의 심장부에 뛰어든 주은래, 외교의 달인이라던 주은래, 그 배포 한번 컸구나!

오후에는 소주로 향했다. 이동 중 춘추전국시대 때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이 주고받은 한판 승부인 ‘와신상담’과 중국 4대 미인의 고사인 ‘침어서시(侵魚西施)’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3시간의 이동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소주에는 유명한 ‘졸정원’(拙政園)이라는 정원이 있는데, 명나라 때 어사 벼슬을 지낸 왕헌신(王獻臣)이 낙향하여 조성한 정원으로 그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다. 졸정원은(拙政園) ‘하룻밤 노름으로 잃어버렸다’ 하여 흔히 ‘불효자정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소주에는 명문가가 많고 과거 급제한 사람이 많아 중국 사람들이 ‘가장 태어나고 싶은 도시’라고 한다. 소주의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고급 비단을 자식에게 꼭 입혀보고 싶어했는데, 당시 고관대작들만 입는 비단을 입기 위해 그곳의 자식들은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절실함이 가져온 결과인듯하다.

현장 연수 4일째, 비상하는 현대 중국의 관문 상해로 오는 도중 도착한 곳은 주씨 집성촌이었던 주가각(朱家角)이었다. 이곳은 ‘물의 도시’로 여유 있는 삶의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나라 드라마도 촬영된 곳이라고 한다. 예스러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방생교인 돌다리를 건너 배를 타고 안쪽으로 접어드니 이국의 정취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심만삼의 명성을 이용한 ‘만삼제’(돼지족발 요리)가 유명하다. 이곳에서 손님을 접대할 때 최고의 음식중의 하나가 만삼제이다.

과거의 중국과 오늘날의 중국이 만나는 곳

다음으로 도착한 곳이 상해박물관이었다. 이곳은 거대한 건물 규모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동아시아 교과서에 나오는 청동북이 있어서 신기했다. 이어 우리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향하고 있었다. 독립 운동가들의 어려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나라 잃은 설움이 밀려오고 그 분들의 고마움도 밀려오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고마움이 교차되면서 마음이 찡하게 울렸다. 이제야 찾아뵙는 후손이 너무나 부끄러울 따름이다. 김구 선생의 집무실을 보니 그 꿋꿋한 기상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 참된 기상을 품어야겠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불빛들이 앞 다퉈 자신을 뽐낼 즈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이름 하여 신천지(新天地)였다. 최신식 건물과 유럽풍의 낭만이 한껏 깃든 이곳은 최신 문물을 받아 들여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 신천지였던 것이다. 중국 속의 유럽을 연상케하였다. 잠시 후 중국 현대의 상징 황포강 일대로 갔다. 이곳은 현대 중국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제국주의 침략 시기 황포강 서쪽 와이탄은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들이 점령하고 그들의 건물을 즐비하게 세웠다. 그러나 이제 황포강 동쪽(포동-푸둥지구)은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발전된 중국의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 동방명주탑이 있는데, 1994년 준공 이래 상하이의 랜드마크로서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방송 수신탑으로 총 높이 468m이며,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가 있다. 전망대에는 발아래를 투명처리 하였는데, 아찔함과 짜릿함이 있었다. 이 탑에서 내려다 본 와이탄은 중국이 드디어 서양을 압도하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였다. 중국의 부강함이 평화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남경의 평화 교육이 중국전역에 잘 정착되었으면 한다. 중국에서 마지막 밤은 지금까지의 탐방에 대한 평가와 자신의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모두들 만족하면서 카페를 개설하고 다시 만날 것 등을 약속하였다. 좋은 결실을 맺길 간절히 원한다.

현장 연수 5일째, 연일 강행군이지만 배움이 있고, 느낌이 있고, 울림이 있어 좋았다. 이날도 아침 일찍 서둘러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일으킨 노신 공원(홍구 공원)으로 향했다. 윤봉길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망명의 길에 올라 1932년 4월 29일 아침, 홍구 공원에서 일본의 시라카와(白川) 대장 등을 즉사케 하는 거사를 단행했다. 노신 공원의 ‘매헌’ 기념관 주변, 유독 눈에 들어오는 굵은 매화 한 그루가 있었다. 윤봉길 의사가 환생한 듯, 윤봉길 의사의 붉은 피로 꽃을 피운 채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다시 찾은 조국을 잘 지켜달라고……”, “꼭 그래야만 된다고 …….”

뜻 깊은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은 소감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독립운동의 정신과 평화의 정신을 가득 담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 교원 현장 연수가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의 길을 찾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인류가 걸었던 야만의 길과 낭만의 길을 직접 둘러보았다. 야만과 낭만이 교차하는 뜻 깊은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본 것은 나에게 큰 영광이다. 이 영광된 길을 여러 훌륭한 선생님들과 함께 걸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큰 감동이다. 이 감동은 가슴 깊이 자리 잡아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울 것이며, 마침내 후손들에게로 면면히 전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후손들은 온 세상을 평화로 감싸는 거목으로 성장할 것이다.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