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역사인물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인식-진정성을 넘어서
  • 이병진 세종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해인사 석탑 앞에 선
야나기 무네요시(1916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년 3월 21일~1961년 5월 3일)는 도쿄 출신으로 민예(民藝)운동의 창시자이다. 잡지 《시라카바(白樺)》의 동인이며, 도쿄대에서 철학과 종교를 배우고,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를 통해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신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14년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조선에 건너와 고 건축물과 도자기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고 건축물(광화문, 불국사)의 보존을 주장하는 등 조선 예술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야나기는 1924년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설하였고, 1936년에는 도쿄 고마바(駒場)에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을 개관하여 현재에 이른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세계관과 한계

야나기 무네요시의 세계관은 블레이크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으로부터 촉발된 동양사상(東洋思想)의 재발견과 동시에, 동서양의 차이를 '미(美)'를 통해 초월하려는 낭만주의적 성향의 것이었다. 그는 1916년 8월부터 2개월 남짓 중국과 조선을 여행하고 돌아와, "지금까지 우리들은 모두 서양의 예술만을 소개했다. 하지만 앞으로 가끔 동양의 작품을 새로운 눈으로 소개하고 싶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서양으로부터 진리(美)를 얻으려 했지만 앞으로는 동양에서 찾아야만 한다"(《시라카바》 1916년 11월호)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그의 동양발견이 심미주의자(審美主義者)들의 전형적인 유형이라는 비판과, 강상중(姜尚中)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일본의 굴절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힘들다.

조선민족미술관 앞에서의
야나기 무네요시(1926년)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인식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

흔히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고 사랑했던 일본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사물이 지니는 미(美)의 원리와 종교적인 원리가 같다고 보는, '종교미학'과 '심미주의'가 결부한 독특한 세계관에 있다. 지난 2005년 나카미 마리(中見眞理)는 야나기 사상의 특징은, 타자(他者)를 통째로 흡수하여 독자성을 잃게 하는 획일성에 대한 비판정신이며, 모든 군사력 행사를 부정하는 '절대평화 사상'에 있다고 평가했다. 야나기는 1916년부터 1940년까지 약 21회에 걸쳐 조선을 여행한다. 그는 조선에서 동서양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미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이 '같은 동양인으로서의 사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광화문 철거계획에 반대하는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건축물을 위하여〉(1922)라는 글을 발표해 일본과 조선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1976년 쓰루미 스케(鶴見俊輔)는 시대적 책무로서 "야나기가 쓴 글 중 가장 효력을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조선민족미술전람회를 위해
야나기 무네요시가 선정한
조선도자기 스케치(1921년)

반면 한국에서는 1968년 김달수(金達壽)가 조선의 백자와 백의(白衣)를 비애나 상복과 관련지어 해석한 것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최하림(崔夏林)과 문명대(文明大)는 한국인을 패배감으로 몰아넣는 제국주의 정책과 교묘하게 혼합되어 '주인이 하인을 동정하는 일본 관 학자들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1995년 유홍준(兪弘濬)은 야나기의 과도한 주관적 감정의 질타를 비판하기보다는 그의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 인식에로 도달하는 사색의 깊이는 높게 평가한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야나기의 조선인식과 민예론을 비평하는 글들이 출현한다. 1988년 이데카와 나오키(出川直樹)는 민예론에서 야나기가 미를 발견하는데 사용하는 직관(直觀)이 민예이론의 모순과 '슬픔의 미'라는 왜곡된 조선공예론을 탄생시켰다고 지적한다. 2003년 이토 토오루(伊藤徹)는 야나기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제국주의에 이용당하는 순진함이 있었고 자신의 편향적인 견해에 대한 반성적 시선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야나기의 사상이 제국주의적 정치와 공범관계에 있다고 단정해 그의 사상까지 전면 부정하는 것은 사상과 대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인식, 진정성의 문제를 넘어 한·중·일의 평화공존사상으로

야나기의 조선론과 관련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 될 전망이다.
논란의 원인은 관념론적인 그의 조선 예술론이 식민지 지배라는 정치적 현실을 '무화(無化)'시키는 초월적인 기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나기가 당시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고 조선을 멸시하던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조선민족의 예술적 우수성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한 보기 드문 일본의 사상가였다는 사실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개인적 감성을 중시한 글쓰기와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주의적 사회에 대한 동경이 야나기의 사상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문화의 특수성에 대한 도취의 시선이 아닌 한·중·일을 어우르는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야나기의 절대 평화사상은 현재 동아시아의 군비 증강 위험성을 환기시키는 담론으로 다시 읽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