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재단 새 책
새롭게 본 광개토왕비:『광개토왕비의 재조명』소개
  • 연민수 재단 역사연구실 1 팀장

광개토왕비에 새겨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긴 시호는 격동의 세기를 보낸 광개토왕의 생전의 모습과 활동을 잘 묘사하고 있다. 414년에 세워진 이 비는 자연석에 1775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록을 통해 고구려의 건국과정, 정치사상, 사회경제, 법령, 국제관계 등 고구려 역사의 독자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동시에 중국의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낱낱히 고발하는 증언록이기도 하다.

1880년경 역사의 긴 잠에서 깨어난 광개토왕비는 일약 국제적 관심이 되어 고구려사를 비롯한 4~5세기 동아시아사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 동북아재단에서 곧 발간되는 이 책은 2012년 광개토왕이 붕어한 지 1600주기를 맞이하여 그간의 연구성과를 확인하고 논쟁점에 대한 재점검을 통해 새로운 연구의 지향점을 모색하기 위해 개최한 학술회의의 성과이다.

최근에 촬영한 광개토왕비

원석탁본의 조사와 연구

광개토왕비 연구의 기초는 탁본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판독이다. 비문변조설을 둘러싼 논쟁이 이진희씨에 의해 제기된 이래 4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국내학계의 일각에서는 이 설에 경도된 학설도 존재하고 민족적 감정에 편승한 무분별한 생각들이 유포되기도 한다.

기조강연을 맡은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교수는 탁본연구의 방대한 업적을 바탕으로 탁본의 시기를 묵수곽전본-원석탁본-석회탁본 순으로 분류하고, 용지법과 착묵상태를 통해 이를 세분화하여 탁본의 편년을 재구성하였다. 그 결과 원석탁본은 4유형으로 분류하고, 비석 발견 직후의 【A1형】탁본은 소지(小紙)에 문자를 탁출한 후, 뒤에 가묵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는데, 현존 사례는 알려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어 【A2형】탁본은 착묵의 용지가 150~160매 정도이고, 각면이 11~12단으로 구성되고, 다소 불착묵(不着墨) 부분이 확인되고, 문자는 약간 두터운 것, 현재 4탁본이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A3형】탁본은 용지는 60매 전후이고, 8~9단의 구성된 상당히 정치하게 착묵되었다고 한다. 【A4형】은 1889년의 중국의 명탁공인 이운종(李雲従) 수탁본으로 용지는 12매, 3단 구성으로 매우 정교한 착묵으로 7탁본이 현존하는데, 이것들이 가장 오래된 양질의 묵본 자료라고 평가한다. 광개토왕비의 학술적 연구는 이미 원석탁본의 시대의 중심에 있다고 하고. 금후는 【A형】 탁본을 중심으로 관련자료의 공개와 자유로운 학술교류를 통해 해석문제와 묵본연구를 균형있게 냉정히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학제적 연구의 필요성

제1부에서는 광개토왕비의 고고, 금석, 서체,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다루었다. 조법종교수는 집안지역의 역사지리적 공간은 근대 이후의 지형변화의 상황을 조선시대 고지도와 근현대 지도를 통해 그 변화상을 추적하여, 태왕릉이 광개토왕릉으로 비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추정하였다. 손인걸 선생은 집안지역의 왕릉 등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고구려시대의 문물의 분포 범위, 보존 현황과 유형의 구조를 확인하고 HM1호묘를 동천왕의 묘로 추정하는 등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었다. 고광의 박사는 광개토왕비 서체는 서사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 고구려의 독특한 양식으로서 '광개토태왕비체'로 명명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우태 교수는 광개토왕비는 능비라기 보다는 수묘인 연호의 착오를 방지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고 하고, 글자의 크기로 보아 이 비의 최초의 독자는 수묘역을 맡은 국연과 간연을 추정하고, 원래의 선돌에 비문을 새겼을 것으로 본다. 권인한 교수는 광개토왕비문의 국어사적 연구를 통해 우리말의 두음법칙의 연원이 최소한 이 비문의 시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문법사에서도 종결사 용법의 '之'와 조사 용법의 '上'을 통하여 이두 발달의 초기 사례에 해당함을 추정하였다.

제2부에서는 고구려의 남방제국과의 관계를 논하였다. 쟁점이 되고있는 신묘년기사의 해석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남방전선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정당화하는 필법으로 구사된 허구의 삽입구로 규정하였고, 안라인수병에 대해서도 종전의 해석인 안라가야의 병력임을 재확인하였다. 비문의 왜에 대해서도 대화정권으로 보는 관점이 대체로 모아졌다. 하마다 코사쿠(濱田耕策) 교수는 광개토왕을 계승한 장수왕은 부왕의 치적을 토대로 국가운영을 추진했다고 하고, 중국의 남북조의 대외관계를 배경으로 해서 고구려를 비롯하여 한반도제국과 왜국의 국가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았다.

새로운 자료의 발견과 비교연구

원석탁본인 水谷本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
1887~1889년 제작)

제3부에서는 고구려의 북방관련 주제이다. 이성제 박사는 『양서』 고구려전에서 후연의 광개토왕 책봉은 북위의 반격에 대비한 일환이었고, 고구려와의 관계개선을 위한 외교였다고 말하고, 고구려는 이 책봉관계를 통해 서방에 대한 우려를 덜고, 남방경략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서영수 교수는 비문의 영락5년조의 패려기사 분석을 통해 이 사건은 고구려가 후연의 요동거점뿐 아니라 요서지역 진출의 신호탄이었고, 이기사가 비문의 서두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고구려의 대외팽창의 전기로서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외에 윤명철 교수는 광개토왕의 업적을 현재적 측면에서 국가발전의 정책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고 21세기의 한민족의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제4부에서 김택민 교수는 고구려 수묘인 제도의 이해를 위한 전제로 사료상에 보이는 중국의 역대왕릉의 수릉제도와 수릉 관련 율령의 조문을 분석하여, 고구려 수묘조에 보이는 전매금지의 조항은 없고, 수묘인도 반드시 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 양자의 차이를 비교 분석하였다. 김현숙 박사는 광개토왕비의 건립목적에 대해 선조왕 및 부왕의 권위를 배경으로 장수왕의 향후 정치적 구상과 의지를 국내외에 표방하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은 기존의 연구성과를 거의 포괄하는 것으로 종전의 연구성과를 재검토하면서 새로운 의견, 향후의 연구방향을 제시하였다. 최근에 광개토왕대의 왕도였던 집안에서는 광개토왕대로 추정되는 집안고구려비가 발견되고 수묘인 제도와 관련하여 광개토왕비와 비교분석하는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금후 새로운 자료의 발견과 치밀한 분석, 유관분야간의 공동연구를 통해 광개토왕시대의 고구려사의 실상이 구체화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