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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면암 최익현 타협을 거부한 행동하는 지식인, 학행일치의 선비이자 구국지사
  • 장세윤 재단 역사연구실 책임연구위원
면암(勉菴) 최익현
(崔益鉉, 1833~1907년)

최근 일본 아베 총리와 주요 정치지도자들, 그리고 일본 우익 단체와 관련 인사들의 한일관계 관련 역사인식과 언동이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구한말 서릿발같은 기개로 조정의 부패와 무능, 일본의 침략을 질타하며 몸소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과 나라의 위기를 타개하려 하였던 큰 선비이자 투철한 구국지사였던 최익현을 떠올리게 된다. 이에 그의 주요 활동을 개관하고 살신성인의 구국운동과 그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위정척사 사상을 자주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승화시켜

최익현은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후일 호(號)를 면암이라 했다. 태어날 때부터 비범하고 눈빛이 형형하였으며,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을 가져 초명을 '기남(奇男)'이라고 하였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충북 단양으로 이사하는 등 여러곳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 때에 성리학의 거두이자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상징적 존재였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 되었다. 스승 이항로의 성리학적 가치체계와 이론, 애국·호국의 정신을 배웠고, 이를 투철한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발전시키고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23세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중 꾸준히 정부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구국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항로를 중심으로 한 화서학파는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에 입각하여 강력한 척화주전론을 폈고, 이를 바탕으로 개항과 개화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위정척사운동은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반대운동을 주도하였지만, 근대적 개혁운동과 개화, 근대화를 수행하는데 대해서는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주요 제자로서 이러한 위정척사운동의 주도적 인물이었다.

최익현은 1876년 1월 일본과의 조약 체결이 논의되고 있을 때 도끼를 갖고 대궐(경복궁) 앞에 나아가 서양화된 일본과의 조약을 거부하도록 강력히 호소하였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지참한 도끼로 자신의 목을 쳐달라고 상소하였다. 이를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라고 한다. 이 상소는 일본은 서양 오랑캐와 다름없는 나라라고 규정한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하면서 일본과 교역을 하게 되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익현은 이 상소로 흑산도로 유배되었고, 결국 강화도조약은 체결되었다. 그의 경고대로 조선(대한제국)은 이 조약 이후 30여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최익현의 사상체계와 실천행동,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 커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 정읍 무성서원
(출처 : 두산백과사전)

그는 1895년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내 목은 자를 수 있지만, 내 머리카락은 절대 자를 수 없다(此頭可斷, 此髮不可斷!)" 라고 하며, 의복이나 두발의 옛 제도 복원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疎)'를 올리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을 토벌할 것을 촉구하였다.

을사늑약 이후인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은 74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전라북도 정읍의 무성서원에서 강회(講會)를 개최하고 내외에 의병의 봉기를 선언하였다. 이 거사는 한말 의병사, 호남의병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후 최익현 의병부대는 정읍·흥덕·순창 등을 무혈점령하였으나, 결국 남원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자진해산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광무황제(고종)의 해산 조칙이 내려지고 동족과는 전투를 치를 수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특히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일본군이 아니고 대한제국 진위대(鎭衛隊)였기 때문이었다. 최익현의 의병봉기는 이처럼 실패하였지만, 호남지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즉 호남 각지에서 의병봉기가 잇달았던 것이다.

6월 14일, 최익현 등 13명의 의병일행은 대한제국 군대에 체포된 뒤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 당국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은 최익현 등을 한국에서 격리된 대마도로 유배하여 한국인들에 대한 영향력을 차단시키려 하였다. 결국 일본의 한국주차군사령부는 8월 14일 최익현 의병 일행 13명에게 대마도 유폐 3년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최익현 일행은 대마도 이즈하라(嚴原)로 압송된 뒤 일본군 경비대에 수감되어 모진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대마도 수선사에 있는
최익현 순국기념비

그런데 도착 직후 일본군 경비대대장은 최익현 등에게 관을 벗게 하고 경례를 강요하며 단발도 강요하였다. 특히 대대장은 의병 일행이 일본이 주는 음식을 먹고 있으니 일본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복할 최익현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오히려 큰 소리로 일본군 장교를 꾸짖으며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심정으로 주위에 단식을 선언하였다. 대마도에 도착한 8월 28일부터 일본인이 제공하는 음식을 거절한 채 단식에 들어갔다. 결국 3일간의 단식으로 노쇠한 몸은 큰 후유증을 일으켰다. 이후 최익현은 병고에 시달리다가 결국 1907년 1월 1일(음력 11월 17일) 대마도의 옥중에서 숨을거두고 말았다.

최익현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의리와 명분, 도의 등은 주자학의 보수적 관념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일본을 질타할 때마다 바탕에 깔고있던 주장과 논지를 보면 일본이 군국주의를 지향한 결과, 인간의 참된 모습의 전제가 되는 도의를 상실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참다운 도덕성의 회복이야말로 일본이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통찰하고 이를 충고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한 핵심적 가치들은 오늘날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정의와 인도, 평화, 그리고 일정한 범위에서의 자유와 등치될 수 있다고 본다.

최근 한·중·일 등 동아시아 3국 사이에 역사인식 및 영토 문제 등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최익현의 일관된 주장은 새로운 시각에서 검토할 만하다. 다만 그가 끝까지 외세를 배척하고 개항과 개화, 혹은 서구적 근대화에 반대한 것은 한계로 남는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