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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세계사로서의 한국사
  • 마우리치오 리오토(Maurizio Riotto) 교수 | 나폴리 "오리엔탈레"(동양학) 대학 (이탈리아) | 아시아-아프리카-지중해 학과(前 아시아학과) 학과장 | 한국학(한국어 및 한국문학) 전공 | Dept. of Asian, African and Mediterranean Studies (formerly Dept. of Asian Studies) | University of Napoli "L'Orientale"

"역사에 대한 더 나은 과학적 연구는 초등 및 중등 교육 단계에서 이뤄지는 역사 교육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비교를 통한 접근법을 기반으로 아이들은 한국 역사의 시초부터 세계 역사의 일부로 접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은 지구와 동떨어진 별개의 행성이 아니라 지구의 일부로서 세계 역사의 참여하고 있다. 한국사는 민족주의적 방식이 아닌 세계 역사의 일부로 가르쳐야 한다."

문화적 표현은 그것의 종류나 국가적 유래와 관계없이 세계와 세계사에 속한다.
한 국가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세계의 역사를 특정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역사에 속한다. 모든 인간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역사는 그들이 공동체로서 존재해온 과거와 현재의 결과물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보유한 두뇌는 그것의 가장 깊숙한 부위, 감각과 감정을 조종하는 가장 원초적인 그 부위를 제외하면 문화를 대변하는 상부 구조적 요소들의 영향에 노출된다. 이는 수많은 역사적 상황들이 각기 다르게 출현하고 다른 양상을 띠면서도 동일한 근원과 의미를 공유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동일한 현상을 두고 다양한 문화에서 각기 보이는 반응을 비교하는 방법론과 하나의 문화가 보이는 반응이 형상화되는 방식을 조사하는 순수 역사학적, 언어학적 방법론, 이렇게 두 가지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해, 본성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모두가 특정 상황을 향해 비슷하게 반응하지만 문화라는 범주에서 보면 그런 반응들이 나타나는 형태는 사람들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결혼식과 장례식은 어느 국가에서나 치르지만 국가마다 고유의 방식으로 치러진다. 방식의 차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역사에서 비롯됐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인류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여러 국가를 놓고 비교해 보면 공통점과 차이점이 공존하는데 그러한 차이점과 그것들이 발생한 원인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역사 연구에 부여된 과업 중 하나이다. 역사는 아주 먼 옛날부터 동에서 서로 혹은 그 반대로 이동하며 끊임없이 교류된 실질적인 경험과 발상들을 아우른다.

어찌되었든 한국에서의 불교와 유교의 부활은 한국의 토속신상, 문학, 설화, 언어, 음식 그리고 한글만큼이나 세계 속에 속해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의 정체성, 문화 그리고 과거를 나타내는 표현들이며 한국인들이 세계의 문화에 기여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가 세계 속에 포함되는 이유이다.

모든 역사 현상은 상호연결 되어있기 때문에 모든 역사적 사안들은 똑같이 중요하다. 하나의 주제를 간과하면 다른 주제를 곡해할 위험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사 중 조선(朝鮮) 말기를 언급하지 않고 독도(獨島)를 둘러싼 문제들을 제대로 논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역사에 있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역사란 모든 인간행위들이 각기 근원을 가진 바다이면서 인간행위들이 모두 강물처럼 흘러 들어가는 바다이기도 하다. 문학은 역사적 현상이고 언어, 정치, 사회와 법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연구는 인류의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이므로 모든 "인문학" 분야들의 어머니이자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이 동아시아 역사에 펼쳐진 주요 테마들과 관련이 있음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역사 연구는 절대로 방수 구획하듯이 세부분야를 정확하게 나누어 구분할 수 없고 역사학자라면 이를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 나는 특정 상황에서 한국의 역사가 아닌 한국인의 역사를 공부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선호한다.

한국인들이 동아시아 역사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이 하나의 국가로 탄생한 길고도 어려운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르면 원삼국 시대부터 한국에 살던 상당수의 주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일본에서는 이런 주민들을 海を渡って来た人, 즉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고인돌이나 옹관묘 등 물질 문화의 주요 요소들을 일본으로 수출했다. 한인동포라는 개념은 고로 최근이 아닌 아주 오래 전에 생긴 것이다.

역사적 전환점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한국의 역사가 동아시아 역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중국 수(隨)나라의 멸망은 고구려(高句麗)와의 전쟁을 치른 후에 뒤따른 사회적, 경제적 위기가 닥친 결과였다. 흑치상지(黑齒常之)나 고산지(高仙芝) 같은 한국인들은 중국 국기를 앞세운 장군으로 복무하면서 중국군의 승리와 패배를 이끈 주역으로 활동했다. 극동지역을 통틀어 8세기 인도에 관한 유일한 기록, 아랍인들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정보까지 수록한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은 신라의 혜초(慧超)였다. 이것 외에도 유사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한국사" 대 "세계사": 학문적 민족주의의 근원

유럽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자국의 역사를 세계사의 일부로 공부시킨다. 실제로 이탈리아에 "이탈리아사"라는 제목의 학과가 별도 개설된 대학은 없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역사를 대략적으로 간단하게 "국사"와 "세계사"로 구분하는 한국과 역사를 가르치는 교육적 접근법에 있어 유럽과 존재하는 차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언뜻 사소하고 쓸데없다고 여길 수 있는 이런 화두는 한국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한국인들"과 "그 외 나머지"라는 단 두 개의 부문으로 인식하도록 가르침 받고 있다는 의미에서 엄청나게 무서운 심리적 영향을 미칠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어린 학생들은 한국이 바깥 세계와 보유한 연줄과 관계들에 대한 의식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이는 바로 한국사 연구에 아직도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학문적 민족주의의 요람이 되고 있다.

위의 논리로 볼 때 역사에 대한 더 나은 과학적 연구는 초등 및 중등 교육 단계에서 이뤄지는 역사 교육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비교를 통한 접근법을 기반으로 아이들은 한국 역사의 시초부터 세계 역사의 일부로 접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은 지구와 동떨어진 별개의 행성이 아니라 지구의 일부로서 세계 역사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사는 민족주의적 방식이 아닌 세계 역사의 일부로 가르쳐야 한다. 더욱이 진정한 학자라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려 하거나 민족주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증거를 위조하려는 시도는 할 수가 없다. 한국 학자들이 이런 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면 유럽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함께 협력하고 공동작업을 하는데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근대" 대 "전근대": 고대사 연구의 미래는?

유럽 역사학자에게는 "전근대사"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수입된 전근대사라는 용어는 유럽에서는 이상하고 무의미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용어가 차별적이어서 한국사 전체를 지난 100년 가량에 해당하는 "근대사"와 2,000년 가량을 차지하는 "전근대사"로 나누다 보면 후자보다는 전자에 훨씬 더 중점을 두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는 전근대사보다 근대사를 연구하는 자리들이 대학교에 생길 가능성이 많아지고 더 많은 학생들이 고대사에 두었던 본래의 관심을 근대사로 돌리게 될 것임을 뜻한다. 그에 따라 전근대사보다 근대사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들에 더 많은 연구비가 배정될 것이다. 학술서 역시 전근대사보다 근대사를 다룬 책들이 더 많이 집필, 출간될 것이다. 이런 차별은 고대사 연구에 막대한 악조건을 형성하는, 혹은 고전 연구 자체의 종말마저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동서양의 고대사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는 학자로서 본인은 한국 학계가 내리고 있는 "근대사"와 "전근대사" 사이의 구분을 재고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그런 구분은 정치적으로 겨우 1776년에 탄생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용납될 수 있어도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정말 용인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