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역사인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 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안중근 하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하얼빈의거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안중근의 의거는 이토 히로부미 처단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 국제재판에서 일제의 한국침략 실상을 세계에 알려 동양평화를 지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1909년 10월 26일 의거현장에서 한국말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치 않고 '우라, 까레야'라 외치고 자진 체포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안중근은 "세계의 대세를 짐작하고 해외에서 신호흡을 하는 자 어찌 무모하게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자가 있을 것인가.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이 동양평화에 지대한 해를 끼치는 일에 일신일가(一身一家)를 돌볼 여지가 없이 결행한 것"이라며, 의거의 명분과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 개인적 원한이 없으며, 만약 개인적 원한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 '세계 대세를 짐작하던'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한국 독립만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의 조국인 일본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며, 이러한 의거의 진실은 당장에 어렵다고 한다면 훗날에라도 반드시 밝혀지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안중근은 의거를 성공리에 결행했으나, 동양평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려는 원대한 목적은 일제의 불법재판에 의해 차단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안중근은 5개월 여의 옥중투쟁에서 보여준 한국 독립의 철학, 그리고 '동양평화론'의 집필 등을 통해 의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뚜렷이 남겼다. 안중근 취조를 담당한 일본인 검찰관조차 '동양의 의사'라 칭했듯이, 옥중에서 발휘한 안중근의 신념은 20세기 초 제국주의가 판치던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가 추구해야 할 자유와 평화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다. 때문에 동북아 평화를 모색해가는 오늘날, 1백년 전 안중근 의거는 여전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안중근 의거는 중국 땅 만주를 무대로 러시아·일본을 비롯하여 서구 열강이 패권을 놓고 각축하던 상황에서 만주 분할점령을 위해 하얼빈을 찾은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국제적인 대사건이었다. 당시 만주는 대륙 팽창의 야욕에 불타던 일제뿐만 아니라, 러시아·미국·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가 뒤엉키며 첨예하게 대립하던 곳이었다. 의거가 일어나던 무렵은 러일전쟁 후 만주지역의 독점적 지배를 위해 러시아와 일본의 야합이 최정점에 이르던 때였다. 때문에 안중근 의거는 동북아와 세계를 진동시키는 국제적 이슈로 부상하였다.

한국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안중근의 사상과 이념은 오래 전부터 구상되던 것이다. 안중근은 해외 망명 이래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투쟁이나 계몽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양평화론'이다.

안중근이 구상한 '동양평화론'의 골간은 서양의 침략을 맞이하여 동양평화를 유지하려면 한국과 청국, 일본 등 삼국이 일치 단결해야 하며, 이들 삼국은 각기 독립을 유지한 가운데 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내세운 동양평화의 범주에는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태국, 미얀마까지를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자주 독립을 유지할 때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동양평화를 유지하려면 이들 국가가 일치단결하여 서양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러일 전쟁 직후 중국 산동이나 상해 등지로 해외 망명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는 당시 상해에서 르각 신부로부터 알사스 로렌이 처했던 국경분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국내에서 교육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바 있었다. 알사스 로렌 출신이었던 르각은 "외세가 침략할 때 나라를 떠나 나라안을 비우면 외적이 침입하기 더 쉬울뿐아니라,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는 충언을 해주었다. 안중근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 빌렘(홍석구) 신부와 후일 옥중생활 때 안중근을 도왔던 듀만(안세화) 주교도 모두 알사스 로렌 출신들이었다. 때문에 안중근은 알사스 로렌이 프랑스령에서 독일령으로 바뀌어진 과정에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알사스 로렌의 경험을 통해 그는 강자와 침략자의 틈바구니에서 약자(대한제국)가 생존하기 위한 방도를 찾고자 노력하였고, 이런 노력은 그의 동양평화론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남의 영토를 소유(침략)하면서 평화를 추구하는 강자의 논리와 달리 자신의 영토를 내놓으며 공동 관리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알사스 로렌 출신들이 열망하던 평화론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얼빈을 찾기 위해 대련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21일 환영 만찬회 연설에서 극동평화(동양평화)를 주장한 바 있었다. 이 때 이토 히로부미의 논리는 동양이 불안한 것은 만주의 치안이 불안한 때문이고, 일제가 만주의 치안을 확보하게 되면 러시아와 중국도 안전해질 뿐아니라 교역이 활발해져 경제도 발달할 수 있다고 했다. 때문에 일제의 만주 점령이 곧 동양평화의 출발점이라는 침략의 궤변을 늘어놓았다. 안중근 의거를 중국인들이 찬양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양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서양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는, 당시 동양을 침략하는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독립과 평화를 지키자는 것이지, 서양 그 자체를 배척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은 그의 천주교 세계관을 통해서도 확인될 뿐아니라, 일본을 향하여 침략성을 버리고 동양평화에 동참하라는 주장에서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즉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데 그 기저를 두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결코 인종주의에 매몰되지 않았으며, 동양평화사상은 세계평화사상과 전혀 대치되거나 모순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듯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국제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기반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높은 수준에서의 원리로서 동양평화의 방도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것은 패권주의의 제국주의 논리인 일본의 아시아연대주의와 명백한 차이를 갖는 것이었다. 아시아연대주의는 일제 침략 정책에 불과한 논리로 겉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략을 당하여 동양 삼국이 연대하여 동양 평화의 질서를 확립해야 할 것을 외치고 있으나, 여기에서 삼국의 연대는 평등한 관계의 연대가 아닌 상하의 관계로 설정된 것이었다. 즉 일제를 아시아의 지도자로 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설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시아연대주의의 또 하나의 본질은 일본 자체의 독립 보전책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이기적 정략의 소산인 아시아연대주의는 일본의 침략정책과 국가적 타산을 은폐하는 수단에 다름아닌 것이었다. 따라서 삼국의 독립을 전제하고 진정한 평화를 지향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는 그 출발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항을 개방하여 삼국이 공동 관할할 것과 또 삼국 대표에 의한 평화회의 기구를 조직함으로써 동양평화의 출발점으로 삼자고 주창했다. 또한 공동 출자에 의한 재정 확보의 방안과 삼국의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 구성 등 경제, 군사 방면에까지 이르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양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의 침략성을 막아야 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안중근 의거는 진정한 의미에서 동양평화의 출발이 되는 것이었다. 안중근이 법정에서 '일본국민을 구원하기 위해 이토를 처단했다'는 주장은, 바로 그같은 동양평화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평화의 기초를 이루는 삼국의 독립을 해쳐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자이므로 처단한 것이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일본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보전하는 길이었다는 것이다. 안중근의 그런 사상은 제국주의적 관점에서는 이해되기 어려운 인도주의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