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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염주성 발굴과 발해 디아스포라
  • 김은국 재단 역사연구실 2팀장

20년 지기(知己), 연해주 만남

연해주는 우리 고대사에서 보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영역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발해 멸망이후 발해 유민 디아스포라의 현장으로 이어오다가, 근대사에서는 청나라, 현대에서는 러시아의 극동 지역에 편입된 곳이다. 그러나 청나라는 멸망하였고, 러시아는 이곳의 전통문화와는 첫 대면이다. 게다가 청나라는 그 선조가 발해와도 친연성이 있었으며, 연해주에는 150년 전부터 수많은 고려인들이 곳곳에 터를 잡고 디아스포라의 진원지를 이루었다. 이곳에 있는 크라스키노 발해성(염주성)을 발굴할 때 지표면의 표토층을 걷어내자마자 드러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1930년대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전까지 남아있던 고려인 유적과 유물이다. 물론 그 밑 지층에는 겹겹이 발해 문화가 1천년 전 층 그대로 자태를 과시한다. 가히 염주(크라스키노) 발해성은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소중한 타임캡슐이다.

다시 추진하는 올해 발굴은 유독 러시아측과의 관련 행정 처리와 선결요인들이 많이 발생하여 발굴 준비가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김없이 인천공항을 출발한 항공기가 연길(延吉) 상공 어디쯤 왔나 생각할 즈음, 이내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때가 1992년이다. 언제 시간이 이토록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찰나의 시간이다. 1990년 한국은 소련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다시 맺었다. 이는 20세기 초 제정러시아와의 외교 단절 이후 실로 1백여 년 만의 사건이었다. 그러한 곳에 어언 20 여 년을 헤아릴 만큼 이곳에 왕복하는 인연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발해 역사때문이다.

재단의 발굴단원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도착 직후 곧바로 크라스키노 발굴 야영장으로 이동하여 천막 및 발굴 장비 등을 정비하고 발굴 준비에 임하였다. 올해 목표로 둔 내성(內城)의 확인을 위해 발굴에 더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종일내리는 비는 이후 일정에서의 날씨 상태를 짐작하여 주었다. 이틀뒤 비는 멈추었지만 염주(鹽州) 강물의 수위와 물살이 너무 빨라 뗏목을 사용하여 성으로 건너가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결국 4일째를 맞는 7월 18일 목요일 양국 발굴단원들은 강물을 피해, 보다 높은 지역에서 우회하여 발굴장에 가기로 결정하였다. 강을 뗏목으로 건너 걸으면 평소 30분 거리이지만, 우회로는 편도 4km로 1시간이나 소요되었다. 그 때문에 크라스키노 기차역에서 핫산 역으로 방향으로 놓인 철길을 건너가야 했다. 이 기차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두만강철교가 나오며 그 너머는 북한 땅이다. 이번 발굴기간 내내 강물이 불어 이 우회로를 자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글은 어쩌면 물과 비만 쳐다보다가 아무 성과없이 돌아왔을 뻔했던 크라스키노 발해성 발굴조사의 올해 상황에 대한 회고와 전망이다.

천년의 기억, 발해 염주성(鹽州城)

함경북도 두만강동에서 철교로 두만강을 건너면 곧 바로 러시아 핫산 역이 나온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1909년 안중근 의사께서 11분의 결사동지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기 위해 단지동맹을 결의한 크라스키노 마을이 있다. 크라스키노! 재단 출범 이후 이곳에 있는 발해 성(城) 발굴과 그 보고서로 말미암아 잘 알려진 지명이다. 러시아의 한 전쟁영웅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의 이름은 연추(煙秋), 러시아 발음으로는 '옌추'라 불렀다. 발해성 옆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 이름도 '옌추하'다. 모두 천 년 전으로 올라가 발해 시대에 설치한 62개의 주(州) 가운데 하나인 '염주(鹽州)와 연결된다. 곧 '연추', '옌추'는 발해시대의 '염주'라는 지명의 근현대적 발음이다. 1860년대를 전후하여 우리 선조들은 두만강을 건너 하나 둘씩 모여들어 터를 가꾸며 제2의 고향을 가꾸어 나갔다. 연추 마을은 한때 연해주 남부 최대의 고려인 마을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러시아의 고려인,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이어주는 가교가 되었다. 핫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여정에서 처음 만나는 크라스키노(연추)는 발해 시대의 염주 마을이다. 우리가 러시아와 공동으로 20년 간 발굴해 온 크라스키노 성은 바로 발해 시대의 염주 성이었던 것이다.

발해시대에는 이 성을 중심으로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여 주었다.
발해 중심인 상경성에서 출발한 사람과 물자들이 이 성을 거쳐 남쪽으로는 신라와 교통하였으며, 동해를 통해서는 일본과 교통하였다. 그래서 발해는 신라로 가는 길, 일본으로 가는 길이라 불렀을 정도다.

홍수를 이겨낸 발굴 성과, 그리고 소망

크라스키노(연추, 염주) 기차역은 이 마을을 동서로 지난다. 이번 발굴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철길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번 발굴에서 어느 해보다 잊지 못할 이곳의 자연환경에 접하고 왔기에 말이다. 우리는 7월 15일부터 딱 1달간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위치한 발해성의 공동발굴을 진행하였다. 올해는 사나흘에 한번 꼴로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발굴이 매우 더뎠다. 특히 발굴 시작 첫 주말에 염주하 (츄카놉카 강)의 범람으로 발굴 야영장에 단원들 허벅지까지 물이 차올라, 급기야 단원의 안전을 고려하여 필수장비만 챙겨 크라스키노 마을 소학교로 긴급 대피하는 등 긴박한 발굴환경이었다. 우회로를 통한 발굴장 왕복을 시도하는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주말 퍼붓는 비와 넘쳐 들어오는 홍수는 결국 야영장을 떠나 마을의 높은 지대를 향해 비상 탈출을 하여야 했다. 이곳의 홍수는 1990년 이래 23년만의 일로 매우 이례적인데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발굴이 끝나고 한국에 와서 파악하니 러시아 정부는 7월 중순 이후부터 연해주 전체에 홍수피해에 따른 비상사태를 선포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거짓말처럼 강물이 빠지고 원상을 회복하여 지력을 회복한 크라스키노 발해성에서 연해주 최초의 청동거울을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래서였을까. 재단의 염주성 발해성 발굴기간이 끝나갈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의 TV 방송기자가 발굴장으로 찾아와 취재해 갔고 이 내용이 8월 13일 방송되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청동거울 완형(完形)의 출토와 도로 유구재발굴은 그간 발굴단의 고투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내년의 발굴 방향에 더 큰 기대를 품게 하였다. 이처럼 재단 발굴이 결실을 거두기까지에는 20년간 지기인 러시아 연구소 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만 그치면 곧바로 발굴장으로 나가 물동이와 양수기로 물을 퍼내면서 발굴을 해 나갔던 양측 단원의 헌신적인 수고와 발굴 사명감. 그것은 이미 발해인들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었던 발해 디아스포라의 향방이리라. 지기란 단지 나를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아주는 것이기에 정과 속 깊은 우정을 나타낸다. 비록 홍수로 인한 것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거쳐 바로 두만강 철교를 건너 핫산을 경유하여 이 크라스키노 기차역에서 내려 곧바로 발굴을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점이다. 동해안 연안에 놓여있는 해안 및 간선 도로, 철도를 따라 북한의 동해안과 두만강 건너 염주 크라스키노로 가고 또 돌아올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