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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역사를 통해서 본 독도 개방의 의미
  • 김병렬 국방대학교 교수

"독도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울릉도에서 우리 백성들을 모두 철수시킨데 있다. 최소한 안용복의 활동을 계기로 울릉도와 독도를 되찾아오고 난 이후에라도 울릉도에 우리 백성들을 이주시켰다면 일본이 독도를 쉽사리 편입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독도 개방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내년에는 30만명의 우리 국민이 독도를 찾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공도정책과 독도

고려시대 삼별초 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던 조정은 이들의 확장도 막고 왜구의 침탈도 저지하기 위하여 서남 해안의 섬 안에 거주하던 백성들을 모두 육지로 데리고 나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의 결과 1270년부터 1374년 사이에 거제도, 진도, 남해도 등 모든 섬들이 빈 섬(空島化)이 되었다. 고려 말의 이러한 주민쇄환조치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다. 허락 없이 섬에 잠입한 자는 장(杖) 1백대의 형을, 섬으로 도피·은거한 자는 경우에 따라 모반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서남해안의 섬들에 대해서만 시행되었던 주민쇄환정책을 동해안까지 확대함으로써 울릉도 역시 1430년경에는 완전히 빈 섬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섬이 비워지게 되자 왜구들이 섬을 침탈의 징검다리로 이용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중국의 황당선(荒唐船)까지 출몰하여 조운로(漕運路)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자 진도, 완도, 위도 등에 황급히 수군진을 설치하게 되지만 울릉도는 육지로부터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1883년 재개척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공도화 정책이 계속되었다. 이처럼 울릉도가 빈 섬으로 장기간 방치되자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어로 작업까지 하게 되었다. 이들은 독도를 울릉도로 항해하는 표지로 삼기도 하고 울릉도에서의 어획량이 적을 때는 독도에서 추가적으로 전복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어로행위는 1693년과 1696년 2회에 걸쳐 도일한 안용복의 활동을 계기로 수 차례 조선과 교섭을 한 끝에 도쿠가와 막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함으로써 일단락될 수 있었다.

울릉도 재침범

당시 울릉도와 독도를 놓고 벌인 조선과 일본과의 외교 교섭은 매우 힘들었다. 울릉도가 조선 땅이라고 하는 답서를 일본사신은 열 달 동안이나 접수를 거부하면서 온갖 비난과 협박을 자행하였다. 원래 조선 땅이었다고 해도 자기들이 70년 동안 이용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땅이 되었다고 하면서 심지어 전쟁불사 위협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조선과의 대립을 원치 않았던 도쿠가와막부가 교섭을 담당했던 대마도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울릉도·독도를 포기함으로써 가까스로 이들 섬을 지켜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울릉도와 독도를 어렵게 지켰으면 즉시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둔전을 설치하여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조선은 오히려 주민들의 이주를 더욱 엄격히 통제하였다. 하지만 일본 역시 쇄국정책을 유지함으로써 울릉도 재침범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메이지 유신 후에 쇄국정책이 폐지되자 일본인들이 다시 동해바다를 왕래하게 되었고, 1880년대부터는 슬금슬금 울릉도에 들어와 거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독도를 재인지하게 되었다. 한편 청일전쟁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끊어 버린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다시 러시아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하게 된다.

독도침탈

처음에 기습공격으로 승승장구하는 듯했던 일본이 1904년 5월에 해군력의 1/3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6월에 다시 3척의 전함이 격침되고 여기에 승선하고 있던 근위 후비 연대 1,095명이 수장되는 등 완전히 제해권을 상실하게 된다.

다급해진 일본 해군은 죽변·울산·거문도·제주도 등 전략적인 지점에 망루를 건설하고 이들을 해저전선을 통해 연결하게 된다. 그리고 울릉도에도 망루를 건설하여 죽변과 해저전선을 통해 연결하기로 한다. 이러한 가운데 또다시 다카시마마루(高島丸)를 비롯하여 많은 함정들이 격침당하게 되자 일본은 여순을 함락시키지 못했음에도 부득이 중순양함 6척 중에서 4척을 뽑아 대한해협에 배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남하하는 블라디보스톡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울릉도에 3개, 독도에 1개의 망루를 건설하게 된다. 당시 울릉도에는 이미 조선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없이 망루터만 징발하였지만, 독도에는 주민이 없었기 때문에 통째로 징발했던 것이다.

독도수복 그리고 그후

일본 제국주의의 욕심에 의해 희생물이 되었던 독도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다시 우리 민족의 품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의 독도 접근은 쉽지 않았다. 학술조사연구라든가 언론취재 등의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독도입도가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94년에 유엔해양법협약이 발효되었고,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독도에 대한 도발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나라는 1997년에 독도에 접안시설을 준공하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국민들의 독도 입도는 여전히 힘들었다. 1999년에 649명, 2000년 1,472명, 2001년 1,533명 ··· . 1회 입도 인원을 제한하다보니 같은 배를 타고 간 승객 중에서도 누구는 상륙을 하고 누구는 상륙을 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되어 매번 상륙할 때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정부에서는 독도대응정책을 일원화하기 위하여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 역사 정립 기획단'이라고 하는 조직을 임시로 만들었다. 기획단에서는 우선 부처마다 다르게 사용하고 있던 독도에 대한 상이한 각종 제원을 통일하여 관보에 고시했다. 그리고 독도 입도인원제한을 풀기 위해 관계기관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소집된 8개 기관 중 경상북도를 제외한 7개 기관은 독도 입도제한인원 해제에 반대하였다. 일본에 대한 불필요한 자극, 독도환경의 파괴, 입도인원 안전상의 문제, 천연기념물인 갈매기 보호 등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할 수 없이 1차 회의를 정회하고, 다시 날짜를 잡아 2차 회의를 하기로 한 후 기관별로 설득에 나섰다.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다고 판단하여 2차 회의를 소집했더니 뜻밖에도 문화재위원회의 동의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2차 회의도 정회하기로 하고 문화재위원회 위원님들을 개별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좁은 공간 때문에 1회 상륙인원이 200명이 넘으면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의견이 다시 제시되었다. 할 수없이 경상북도를 시켜 시험적으로 가장 큰 배인 한겨레호의 정원(445명)을 전부 상륙시킨 후 그 상태를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검토하기로 했다. 그 결과 하선할 때나 상륙해서 사진촬영 등의 활동을 할 때나 다시 배에 승선을 할 때 전혀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히려 상륙인원을 제한할 때 보다 더 차분하고 더 안전했다.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1차로 상륙인원을 200명으로 확대한 후 단계적으로 470명까지 늘리되 1일 상륙인원을 1,880명으로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험난한 과정을 거친 의사결정이었지만 독도 상륙인원을 증가시킨 결과 금년에 상륙인원이 이미 22만명에 도달했다고 한다.

독도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울릉도에서 우리 백성들을 모두 철수시킨데 있다. 최소한 안용복의 활동을 계기로 울릉도와 독도를 되찾아오고 난 이후에라도 울릉도에 우리 백성들을 이주시켰다면 일본이 독도를 쉽사리 편입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독도 개방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내년에는 30만명의 우리 국민이 독도를 찾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