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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이역만리에서 반가운 우리의 얼굴을 만나다
  • 장세윤 재단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10월 25일 카자흐스탄의 옛수도 알마티 고려극장
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가한 고려인 동포들과
백주현 카자흐스탄 대사,이종찬 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과 한국사회, 한국인들이 카자흐스탄과 그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 동포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며, 앞으로도 긴밀한 교류와 협력에 나서야 한다."

지난 10월 24일부터 28일까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찬)가 주관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한 홍범도장군 서거 70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를 다녀왔다. 인천공항에서 카자흐스탄의 대도시 알마티까지는 무려 13,000km에 달하는 먼 거리였다. 그렇게 먼 곳에 우리의 핏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봐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카자흐스탄의 크즐 오르다에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가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홍범도장군에 대한 책을 세 권 출판한 바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홍범도장군의 묘를 참배하고 그분의 위대한 생애를 반추하며 현지 사정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때마침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에서 홍장군의 서거 70주년을 계기로 성대한 추모식과 학술회의를 현지에서 개최하면서 필자도 묘소 참배와 학술회의 토론을 위해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이미 우리 재단에서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들과도 현지조사사업과 도서출판 등 다양한 교류와 협력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때문에 그곳의 사정은 그리 생소하지 않았다.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장군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꼴머슴, 하급군인, 종이공장 노동자, 사냥꾼 등을 전전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위기가 닥쳐오자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장군은 1907∼8년 함경남도 산악지대에서 산포수 의병부대를 이끌고 신출귀몰하는 유격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농락하여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1920년 봉오동·청산리전투 등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다. 이후 예편한 그는 동지들과 함께 농업에 종사했지만,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1937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크즐 오르다('붉은 사막'이라는 뜻)에 정착하였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1943년 10월 25일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20여명의 일행과 함께 도착한 알마티는 현지어로 '사과의 도시'라는 뜻이라고 했다. 건조한 곳이지만, 부근의 천산산맥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를 이용하여 관개농업이 활발하고 기후도 쾌적하여 인구 1백여만에 달하는 대도시이다. 알마티는 오랫동안 카자흐스탄의 수도였지만, 이 나라는 근래 수도를 북방의 아스타나로 옮겼다. 알마티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고려인 동포들이 운영하는 국립고려극장이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깔끔하고 잘 운영되고 있었다.

25일 11시부터 오후 5시 30분 경까지 엄숙한 추모식과 학술회의가 진행되었다. 오전의 추모식에는 백주현 대사와 알마티 총영사가 참석하였고, 계 니콜라이 등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학술회의 대주제는 '홍범도장군의 독립운동과 고려인 사회의 정체성'이었다. 이날의 추모식과 학술회의 소식은 한국 KBS-1TV의 '9시뉴스'와 일부 언론에 보도되었고, 알마티 현지의 방송과 한국어 신문 『한인신문』과 『카자흐뉴스』 등에도 보도되었다.

고려인 동포 배우들이 재현한 연극
‛홍범도'의 한 장면

25일 밤에는 '연극 홍범도'가 공연되었다. 1942년 홍범도장군이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할 때 공연된 이후 거의 70여년 만이었다. 약간 어색한 한국어가 나오기도 했으나, 연극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10월 26일에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고려인 동포들이 많이 살고있고, 홍범도장군이 살다가 별세한 크즐 오르다로 향했다. 이곳은 러시아인들이 무척 사랑했던 록가수 빅토르 최(1962∼1990)의 고향이기도 하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크즐 오르다 일대는 거칠기 짝이 없는 반사막 지대의 황무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키르키스스탄에서 발원하여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시르다리아(Syrdaria)강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벼농사가 가능했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간 홍범도장군의 묘역은 황량한 벌판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앞에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로 평가되는 계봉우(1880∼1959) 선생의 묘가 있었다. 1984년 11월 설치된 홍범도장군의 반신상은 엄숙하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현지 동포들은 한국에서 간 일행과 함께 정성스럽게 헌화하며, 홍범도 장군의 70주기를 추모하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홍범도장군
반신상에 헌화하는 고려인 동포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러 청소년들 중 일부는 현지인들의 핏줄이 섞이기도 했으나, 대부분 우리의 얼굴과 다르지 않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정말 실감되었다. 필자는 졸저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독립전쟁』을 홍장군의 반신상 앞에 헌상하며 장군의 명복을 빌었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였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 이후 폭압적 정책을 폈던 스탈린정권은 고려인·중국인 등 러시아 영역 밖에 주권국가가 있는 소수민족을 '디아스포라(Diaspora)민족'이라 칭했는데, 1930년대에 들어와 이주정책을 무리하게 강행하였다. 결국 1937년 9월 블라디보스톡 등 극동 러시아지역에 살던 20여만 명의 고려인들은 갑자기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황량하고 거친 황무지에 내버려지다시피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억척스럽게 살아남았다.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과 끈기, 강인한 정신력으로 현지에서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여 흰 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냈으며, 성실한 자세로 현지사회에 기여하였다.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장군의 존재는 단순한 독립운동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고려인사회 전체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상징하고 있었으며, 현지 고려인들과 모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한국사회, 한국인들이 카자흐스탄과 그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 동포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며, 앞으로도 긴밀한 교류와 협력에 나서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야 했던 우리의 핏줄들이 이제는 자랑스러운 해외 동포로서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다. 최근 '한인 디아스포라' 문제가 주요 연구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같은 핏줄, 한민족이라는 커다란 울타리로 품어 안으면서 그들이 겪었던 쓰라린 고통과 상처를 쓰다듬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