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물자의 교류만이 아니라 정보, 지식, 종교 등을 연결해 주는 공간인 바다. 이를 제패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바다는 가까이는 중국·일본으로, 멀리는 세계로 통하는 교통로이기도 하다."
명(明) 영락(永樂) 3년(1405)부터 선덕(宣德) 8년(1433)까지의 28년간 전후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 인도양·페르시아만·홍해의 여러 나라를 거쳐 동아프리카연안까지 다다랐던 서양 원정의 주역은 태감(太監) 정화(鄭和)였다. 그는 홍무 4년(1371)에 운남(雲南) 곤양현(昆陽縣)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생가의 성은 마씨(馬氏)로 대대로 이슬람교도였다.
정화는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있었다. 문(文)은 공자와 맹자에 통하였으며 병법에도 정통하여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신장은 180㎝정도로 훤칠한 키에 허리둘레가 1m나 되는 거한이었다.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가 무관도 아닌 일개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은 환관인 정화를 원정대의 대장으로 삼았던 점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락제가 정화를 서양에 파견한 목적은 여러 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주요한 요인은 해외에 명조의 위엄을 보이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정화의 원정에 통역과 번역 임무를 맡아 수행했던 마환(馬歡)이 남긴 시의 일부는 험난한 파도를 뚫고 미지의 세계에 영락제의 조칙을 전하고자 했던 정화의 함대가 곤란을 겪던 장면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당시 항해는 계절풍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정화가 중국을 떠난 것은 동북풍이 불기 시작하는 10월 이후였다. 이 때 그가 거느린 27,000여 명의 장병은 세계 최고수준의 조선기술로 건조된 대선박 60여 척에 나누어 타고 나침판과 항해도를 사용하는 진보된 항해술을 구사하였다. 정화가 타고 간 배는 길이 150m, 폭 2m, 적재량 1,000톤(혹자는 2,500톤) 전후의 거함이었다. 정화보다 80년 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선단은 3척의 배로 구성되었다. 기함 산타마리아호는 길이 35m, 130톤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의 선박 건조 기술이 서양보다 훨씬 앞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화는 병력을 동원하여 각국의 분쟁 해결에도 적극 간여하였다. 말라카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국(國)'이라는 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조는 두목에게 은인(銀印)을 하사하고 '국(國)'으로 칭하게 하여 자신들의 제국질서체제에 편입시켰다. 당시 말라카는 북으로 태국(暹羅), 남으로 쟈와(Jawa)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말라카는 명조에 섬라의 침입을 막아줄 것을 청하자, 정화는양국 간의 분쟁을 해결한다. 이후 섬라의 지배에서 벗어난 말라카는 급속히 국력을 강화하여 마침내는 말레이시아 반도 대부분과 수마트라 섬 동안의 일부를 영유하는 강국으로 발전하였다
정화의 원정으로 인해 북경에는 처음으로 신기한 동물인 기린이 출현하였다. 이 기린은 소말리아 등지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명조관료는 상서로움의 상징인 기린을 대하게 되자 황제에게 축하의 글을 올렸다. 고대부터 중국에서는 황제의 도(道)가 성대할 때 기린이 나타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상상의 동물을 실물로 대면한 황제와 관료는 그 경이로운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정화가 팔렘방에서 귀국하기 직전 영락제는 몽골 원정에서 귀환하는 도중에 생을 마쳤다. 영락제를 이은 홍희제(洪熙帝. 재위:1425, 1년간 재위)는 "서양 여러 나라에 간 보선(寶船)은 모두 정지한다. … 각처에서 수리 건조하고 있는 배는 모두 정지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이에 해외 원정길은 잠시 동안 끊기게 되었다. 정화는 남해(南海) 원정을 떠났던 군사들을 이끌고 남경 궁전을 수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후 선덕제 때 최후의 제7차 원정이 거행되었다. 원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였을 때 이미 그의 나이 60을 넘었다. 귀국 후 2년 뒤 숨을 거두었고, 남경 남쪽 우수산(牛首山)에 묻혔다.
이후의 황제들도 정화의 사례를 들어 군사를 서양에 파견하려고 시도하였다. 일부 관료 환관들은 정화의 옛 추억을 상기하기도 하였다. 서양 원정을 통해 황금, 진귀한 보석 등을 획득하였는데 그 길이 중단되자 창고가 고갈된 데 대한 자책이었다. 성화제(成化帝. 재위: 1465~1487) 때 정화의 바다 노정을 찾는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병부랑중(兵部郞中) 유대하(劉大夏)는 "삼보(三保.즉 정화)의 서양으로의 출항은 비용 수십 만 냥을 낭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민의 희생자도 만 명에 달할 정도입니다. 기이한 보물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해도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며, 원정 관련 기록을 숨겼다. 편협하고 우매한 판단이 대항해 시대의 선구자 정화의 위대한 업적을 망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정화의 원정이 국가의 재정을 소비하고 군사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측면도 일면 있었겠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원정으로 인해 명조의 무역은 활발해졌고 국고와 시중에 재물이 가득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졌다. 그의 원정을 세계 항해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시기보다 83년,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보다 87년이나 빨랐다.
최근 영국의 퇴역 함장인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는 정화의 6차 원정 시 한 분견대는 희망봉을 돌아 북아메리카에 도달하였고, 또 다른 분견대는 남쪽으로 오스트레일리아·남극까지 도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콜럼버스나 마젤란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도 정화 원정대가 남긴 해도(海圖)에 의거해서 항해가 가능했다는 설을 내놓은 것이다. 이 주장의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명조가 해금정책(海禁政策)이라고 하여 바다에 빗장을 건 순간 인도양으로 나아가는 바닷길은 공식적으로는 단절되었다.
정화가 누비고 다녔던 그 바닷길에 중국 함대가 사라지자 16세기를 전후해 서양의 세력들이 밀려들어 왔다. 이른바 대항해시대의 시작으로, 포르투갈을 위시한 서양 세력은 인도양을 넘어 동남아시아의 바닷길을 점유하는 동시에, 그 해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문물과 산물을 독차지하였다.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한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서양에 패배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는 바다의 중요성을 간과한 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과 물자의 교류만이 아니라 정보, 지식, 종교 등을 연결해 주는 공간인 바다. 이를 제패하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바다는 가까이는 중국·일본으로, 멀리는 세계로 통하는 교통로이기도 하다. 대항해 시대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정화같은 인물이 우리나라에도 다수 출현하여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치며 세계로 항해해 가는 꿈을 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