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사귀지 않고 낯으로 사귀는 것은 면교 (面交)이고, 낯으로 사귀지 않고 마음으로 사귀는 것이 바로 신교(神交)입니다. 진실로 마음으로 서 로 우애하면 천만 리 떨어진 곳도 집안의 마당과 같고, 천만 년 먼 시간도 아침저녁과 같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얼굴을 알고 모름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오래고 아닌 것에 얽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홍경모, 「여수석촌(輿帥石村)」
홍경모(洪敬謀, 1774~1851)가 연행(燕行)에서 19세기 청나라 학자 기 수유(紀樹蕤)에게 준 편지의 한 대목인데, 일국 너머 만남을 주목하고 있다. 흔히 다른 나라 인물과 사귀는 것을 해내신교(海內神交)라 한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연행에서 청나라 학예계(學 藝界)의 좌장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완원(阮元, 1765~1848) 등과 신교를 맺었다. 24세의 신예학자 김정희는 이들과 망년지교(忘年 之交)를 맺고, 청대 고증학의 진수를 직접 확인하였다. 연행 이전 추사 는 스승 박제가(朴齊家)로부터 이미 청대 학술의 동향을 누구보다 소 상하게 알고 있었다. 추사는 옹방강과 완원과의 토론에서 자신이 지닌 학예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였고, 옹방강은 조선에서 온 젊은 학자에 게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 극찬해 마지않았다.
옹방각은 추사에게 자신의 저작인 『소재필기(蘇齋筆記)』를 비롯하여, 시집과 최신의 청대 학술성과를 지속적으로 건네주었고, 완원 역시 자 신이 편찬한 방대한 고증학 성과를 전하였다. 특히 완원은 『십삼경주 소(十三經注疏)』와 『황청경해(皇淸經解)』등을 편찬하였는데, 『황청경해 (皇淸經解)』는 왕선겸(王先謙)의 속편과 함께 청대 고증학의 정수로 꼽 힌 역작이었다. 완원은 이 책의 초판을 간행하자마자 추사에게 전할 정도로 해내신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이러한 신교에 가교 역 할을 한 인물은 역관(譯官) 제자였던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을 비롯하여 추사 주변에 있었던 많은 역관들이었다. 이들 역관 제자들은 자국에서와 달리 연경의 학예계에서 조선의 사대부 학자보다도 남다 른 주목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이를테면 이상적은 생전에 자신의 문 집을 청에서 간행한 바 있는데, 이는 예전에 없던 초유의 일이었다. 더 욱이 이상적의 문집은 단번에 '해내에서 구하고자 해도 얻기 어려운' 책으로 연경 학예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은 것을 넘어, 청대 학술·문 화의 발원지 강소(江蘇)와 절강(浙江)을 비롯하여 중국의 전역으로 유 통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추사와 역관 제자들의 관계는 일반적인 사 제관계를 넘어 신교의 일원이자 추사학 정립의 일등공신이었다.
추사는 이러한 신교를 통해 누구보다 빨리 청대 학술의 최신 성과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학술을 정립하는 토대로 삼을 수 있었다. 이러 한 추사의 신교와 교류는 두 나라 학술과 문화의 교류에 본격적인 물 꼬를 트는 데에 기여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를 두고 19세기 경화사족의일원이던 홍한주(洪翰周, 1798∼1868)는 『지수염필(智水拈 筆)』에서 "추사는 젊어 벼슬하기 이전에 아버지를 따라 연경 에 들어가 담계 옹방강과 교유하였는데, 옹방강이 그의 재 주를 아껴 깊이 허락하였고, 또한 많은 연경의 선비들과 왕 복하며 토론하였다. 이 때문에 추사의 이름이 서촉(西蜀) 과 강남(江南)에까지 두루 퍼졌다."라 언급한 바 있다. 홍한 주는 무엇보다 추사의 신교가 두 나라 학예계에 새로운 지 식·정보를 상호 유통시킨 사실을 특기한 것이다.
19세기 조선 학예(學藝)의 길잡이, 동아시아를 향한 발언
추사는 자호(自號)가 많다.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 庵),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을비롯하여일일이거론할수없을정도다.추사는한 때,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편액(扁額)을 걸고 '상하삼천년 종횡십만리지실(上下三千年縱橫十萬里之室)'로 당호(堂號) 를 한 바 있다. 시간적으로 삼천년, 공간적으로 십만리에 자신을 제일로 생각한 추사의 학적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 언급은 청나라의 염약거(閻若璩)가 쓴 황종희(黃宗 羲) 제문(祭文)에서 "상하로 오백년 종횡으로 일 만 리 사이 에박학하면서도정밀한사람이셋이있다. 한사람은처사 (處士) 고염무(顧炎武)이고, 한 사람은 전겸익(錢謙益)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선생이다"라고 하였는데, 추사는 이를 의 식하고 편액에 걸었다. 주지하듯이 전겸익(1582~1664), 고 염무(1613~1682), 황종희(1610~1695)는 모두 중국 명말청 초(明末淸初) 최고의 석학으로 지목받은 인물이다. 양계초 (梁啓超, 1873~1929)는 『청대학술개론』에서 고염무를 청나 라 학문의 창시자라고 칭송하였고, 황종희를 실사구시(實 事求是)의 대가로 주목한 바도 있다.
이처럼 추사는이편액을통해 이들의 성과를 뛰어 동아시아 지성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기를 희망하였다. 실 제추사는동아시아학술을시야에 두고 자신의 학적체계를 구축하고 성취를 이루기 위해, 연경학예계의흐름을장 악하는 한편 일본의 학술적 성과에도 남다른 시선을 두었 다. 추사가 스승으로 대우한 옹방강의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것이아니라,그를넘어개관적시각과동아시아 학술을 시야에 두고 법고창신(法古創新)하고자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추사는 옹방강이 마뜩잖게 여기던 대진(戴震, 1723~1777)이나 능정감(凌庭堪) 등의 학설도 높이 평가한 것은 하나의 예이다.
추사는 일본의 서적 출판과 학술 성과에도 주목하였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나 소길(蕭吉)의 『오행대 의(五行大義)』 같은 서적은 다 중국에도 이미 없어진 것인 데, 오히려 일본에 보존되어 있으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라고 반문하기도 하고, "백여 년 이래로 나카에 도쥬〔中江 藤樹, 1608∼1648〕,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학이 크게 번성하면서 동시에 시문은 창명(滄溟) 이반룡(李 攀龍)을 숭상하면서 점차 세속적인 문체를 변화시켰다"고 일본 학술사의 흐름을 개관적으로 비평하고 있다. 이 언급 은 일본 고학파의 탄생과 이후의 영향을 정확하게 제시한 것이다. 추사가 조본렴(篠本廉, 1743~1809)의 문장을 평하 면서"그의글세편을보니천박하고고루하며경박한습 관을깨끗이씻어문사가빛나며,또한이반룡의문장격식 을쓰지아니하여중국의작가라하더라도그보다나을수 는없었다"라고격찬한것은그의비평적안목의넓이와깊 이를엿볼수있는대목이다.이같이추사가일본학술의 성과를 비평한 것은 평지에서 돌출한 것이 아니라 꾸준한 동아시아 서적의 출판·유통과 출판문화의 활황에 힘입었 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아! 나가사키의 선박이 자주 중국과 왕래하며 통하고, 비 단이나구리등의무역은오히려두번째다.천하의서적도 산넘고바다건너전해지고있다.옛날에우리에게의뢰하 였지만,마침내우리보다먼저보는것도있다....중략... 그러므로이한가지일만보고서도천하의대세를알수 있을것이다. 그사람들이비단이나구리와서적이외에중 국에서 얻어가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아!
김정희, 『완당전집』
동아시아 학술을 시야에 두지 않고서는 이러한 언급은 불 가능하다. 유배지에 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이 러한정황을인식하고,최신의청조학술에자신의경학저 술을검증받으려한것도추사가동아시아학술을향한넓 은시야와지성을인정하였기때문일터이다.이점에서추 사 김정희는 19세기 동아시아 학예계에 우뚝한 자취를 남 긴 지성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