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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카이로 선언 7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개최
  • 홍성근 재단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2013년. 카이로 선언이 있은지 70년이 되는 해였다. 70년 전의 그날을 기억하며 국내외에서 카이로 선언에 관한 학술회의가 몇 차례 열렸다. 이집트 카이로 현지에서도 카이로 선언을 기념하 는 학술행사가 주이집트 한국 대사관(대사 김영소) 주최로 개최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도 카이 로 선언 70주년에 맞추어 조지워싱턴대학교 시거아시아연구센터(The Sigur Center for Asian Studies, 이하 시거센터)와 공동으로 학술회의를 기획하였다. 여러사정을 고려해 행사 날짜는 2013년 12월 2일 월요일로 잡았다.
학술회의 개최지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가 아닌,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였다. 그것도 미국 정 치, 국제 정치·외교의 핵심에 있는 백악관을 바로 옆에 두고 있는 조지워싱턴대학교. 더욱이 조 지워싱턴대학교는 2013년 한해 동안 카이로 선언 내용 중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내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느냐'를 둘러싸고 논의되었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모교이기도 하다.

카이로 선언의 역사적 배경과 우리의 아쉬움

70년 전 국제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암흑 속을 횡행하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온통 죽음의 그 림자로 가득했다. 그 어두운 구름을 뚫고 이집트 카이로에 연합국의 수뇌들이 모였다. 미국의 루즈 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냉엄한 국제 관계 현실 속에서 서로의 국익 을 꾀하였다. 그 치열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침략과 식민지 체제를 기필코 청산하고 평화와 번영의 국제질서를 수립해야겠다'는 선한 의지들이 거역할 수 없는 물줄기가 되어 쏟아져 나왔다.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다른 모든 영토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위의 3대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이 적절한 과정을 통해 자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 하였다."

이 선언은 한국민에게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 이 되었다. 그 선언의 정신과 내용은 1945년 포츠담 선언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남는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이어지는 연합국의 전후 처리가 카이로 선언의 정신과 원칙에 기초하여 좀 더 구체화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무엇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역사 및 영토 갈등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아쉬움을 더욱 진하게 갖게 한다.

카이로 선언 7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워싱턴에서 열다

지난역사에 대한 아쉬움속에서 개최된 이번 학술회의는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주제를 "동북아의 역사 화해와 번영: 카이로 선언 70년"으로 잡았다. 학술회의는 조지 워싱턴대학교의 마이크 모치즈키(Mike Mochizuki) 국제관계 대학 부학장의 개회사와 김학준 재단이사장의 환영사로 시작 됐고, 안호영 주미 한국대사의 축사로 이어졌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치코)의 제임스 매트레이(James I. Matray) 교수가 "카이로 선언과 동북아의 역사적 유산"이 라는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그 뒤를 이어서 발표와 토론이 세 개의 세션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제1세션은 동북아의 영 토문제, 제2세션은 동북아의 인권문제, 제3세션은 동북아의 역사인식이었다. 12월 2일 월요일 아침 9시 30분에 시작된 학 술회의는 오후 6시까지 빼곡하게 발표와 토론으로 채워졌다. 이번 행사에는 역사학자, 국제법학자, 국제정치학자 등 각 분 야의 전문가들이 발표와 토론에 참가하였다. 이중 국내 언론 이특히관심을많이가졌던부분은 독도였고,특히래리닉쉬 (Larry Niksch) 박사의 독도에 관한 우호적 토론이었다. 닉쉬 박사는 전(前) 미국 의회조사국의 선임연구원으로 동아시아문 제 전문가이다. 그는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고 했 던 1877년의 태정관 지령을 염두에 둔 듯, "1870년대 메이지 정부의 문서 등을 고려하면,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주장이 더 강하다"고 말했다. 또한 일본의 1905년 소위 '독도 편입' 조 치와 관련하여 일본의 주장이 정당화되려면 당시 일방적으로 편입할 것이 아니라 조약을 체결하여 독도를 사들였어야 했다 며, 나름의 논리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메릴랜드대의 존 쇼트(John Rennie Short) 교수는 영 국과 프랑스 사이의 해협을 영·불 양국의 명칭('English Channel/La Manche')으로 병기한 국제적 사례와 고지도의 동해 명칭 표기를 예로 들면서, '일본해' 단독 표기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일본 관동학원대의 하야시 히로부미(林博史) 교수 는 일본군 '위안부'의 참혹한 역사에 대한 일본 젊은이들의 몰 인식과 몰이해를 사례로 들면서, 일본이 이 문제를 회피해서 는 안 된다는 점을 피력했다. 그리고 다트머스대의 제니퍼 린드 (Jennifer Lind) 교수는 "1950년대 서유럽은 미·소 간 대립으 로 전쟁의 위협이 있었고, 독일과 프랑스는 이러한 환경에서 벗 어나고자 함께 대안을 찾으며 역사 화해를 시도했다. 반면, 한 국과 일본은 각기 미국과의 관계만을 중시하는 전략적 환경이 한·일 간 역사 화해를 저해한 측면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번행사의패널구성을비롯하여참가자섭외,행사홍보등 은 동북아역사재단과 시거센터가 공동으로 추진하였다. 함께 추진한 행사이긴 했지만, 재단으로서는 사전에 현지 출장 없 이추진한행사여서행사장구조등을정확히알지못했다. 전자메일과 사진을 통해 수시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긴 했지 만,행사장대여,당일행사준비와진행등에대해서는전적 으로 시거센터 쪽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행사가 개 최되는 조지워싱턴대학교의 국제관계대학 건물은 추수감사절 주간에는 건물 전체가 폐쇄되어, 행사 당일 새벽에야 출입이 가능하였다.

시거센터 측 실무진과 잦은 의견 교환이 무엇보다 필요했고, 회의에 임박해서는 하루에 몇 차례씩 전자메일을 주고 받았 다. 한국의 서울은 업무를 시작하는 시간이고, 미국의 워싱턴 DC는 업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시거센터 측 은 우리의 질의와 요청에 성실하게 임해주었다. 회의를 성공적 으로 개최하고자 하는 실무진들의 마음은 같았던 것이다. 어떠한행사이건늘걱정되는것이청중참가다.약4주의시 간을 앞두고 학술회의 개최 소식이 시거센터 홈페이지(http:// www.gwu.edu/~sigur)에 게시되었고, 또 시거센터 연결망 을 통해 현지 유관기관 및 전문가들에게 전해졌다. 청중을 수 용할수있는학술회의장소의제약과더불어,식사예정인원 을 파악해야 했기 때문에 사전에 홈페이지를 통해 참가신청을 받았다. 하지만 걱정이었다. 12월 2일은 추수감사절 주간 바로 다음날이라과연청중석을다채울수있을까하는것이었다. 그런데막상참가신청을받고보니,신청자가너무많이몰려 서 행사 며칠을 앞두고 참가 신청사이트를 폐쇄해야 했다. 행 사에 대한 반응도 좋았다. 특히 국내 언론에서는 거의 실시간 에 가깝게 학술회의 소식을 전했다.

카이로 선언 70주년을 보내면서

이제 카이로 선언 70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도 끝났다. 1943년 카이로로 향했던 마음들을 추슬러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미래로 마음을 돌리기엔 마음이 여전히 무겁다. 이 글을 쓰고있는이날(12월26일),일본의아베총리가보란듯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동북아시아에서 지난 날의 제국주 의 망령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 2023년에도, 2033년에도, 그 리고 카이로 선언 100주년이 되는 2043년에도 카이로 선언 기념행사는 계속될 것이다. 역사는 우리의 미래를 곧게 하는 다림줄1)이 되기 때문이다.

 

1) '다림줄'은 건축에서 '수직으로 바로 섰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추를 달아서 늘어뜨리는 줄'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