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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중일 관계와 새로운 동아시아 평화를 생각하며
  •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성균중국연구소장

"역사문제가 과도하게 정치화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한편 역사공론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2010년과 2012년 발생한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 분쟁을 계기로 시작된 중일관계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퇴행적 역사인식은 상황을 더욱 악화 시키고 있다.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해 일본 아베총리는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한편 한국과 중국을 향해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미래세대에 대한 교과서까지 왜곡의 수단으로 삼는 등 진정성 없는 대화제의에 실망한 한국정부는 일본의 제의를 일축했다. 중국도 '진상을 감추려고 하다가 도리어 드러난다, 닦으면 닦을수록 검어진다(欲盖弥彰 越抹越黑)'면서 일본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한편 "중국 최고지도자는 아주 바쁜 분들이다. 그 분들이 쓸모 있고, 효과 있는 일을 하시게 하고 싶다"고 밝히며 면박을 주었다. 여기에는 제국주의 향수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일본에 대한 한·중의 감정외교(sensibility in diplomacy)도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일본의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도 일본의 행동이 야기하는 동북아질서의 불확실성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은 17년만에 일본과 방위협력지침을 재개정하기로 합의해 일본의 '보통국가' 이행에 숨통을 틔워 주면서도 2007년 미국 하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제정한 지 7년만에 미국 대통령이 서명했으며 일본을 겨냥해 '과거사를 존중하며 해결해야 한다'고 분명한 선을 긋기도 했다. 미국의 곤혹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중일관계는 단순한 영유권이나 역사인식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동북아 안보질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보다 복잡한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옌쉐퉁(閻學通)교수는 향후 10년내에 양극질서가 형성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이러한 질서변화를 동북아에 적용한다면, 미국은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을 통해 중국부상의 속도를 줄이고자 할 것이고, 중국은 미국에 대항해 반(反)균형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다. 반면 일본도 이러한 미·중 구도를 흔들어 미·중·일 정립(鼎立)구도로 바꾸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구사할 것이다.

이러한 동북아 판의 변화에 대해 소외를 느끼는 일본의 대응이 보다 적극적이다.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아베 내각은 '강한 일본'과 아베노믹스가 가져온 자부심을 바탕으로 지지세력의 동원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실제로 유사사태에 대비해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해왔던 미·일안보체제를 자위대가 미군과 함께 대응하는 집단자위권을 확보하려고 하고 있고, 이미 협의를 달성한 미일방위협력 지침을 재개정하는 수순을 밝으면서 전후 평화질서를 부정하는 우경화와 보통국가의 수순을 밟아나가고 있다. 특히 일본은 현재의 미일동맹을 담보로 중국을 더 밀어붙일 공간이 있다고 보고 있고, 향후 전개될 새로운 협상고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중국위협론'을 부각시키면서 자신의 논리를 강화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반면 중국도 부상한 힘을 바탕으로 좀 더 공세적 외교를 펴고 있다. 방어적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는 도광양회(韜光養晦)전략을 버리고 국제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른바 주동작위(主動作爲)노선이 그것이다. 여기에 네티즌 등 여론이 중국의 정책결정과정에 깊게 반영되면서 보다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비록 중국은 2010년 중·일관계가 악화되었을 무렵 사용한 희토류 수출중지와 같은 경제조치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나 중일갈등에 대해 일본이 비판수위를 높일수록 매뉴얼대로 맞대응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 관동군의 잔악한 실상을 지속적으로 고발하고 있고, 왕이(王毅) 중국외교부장은 "일본이 중·일 관계의 마지노선까지 계속 도발한다면 중국 역시 끝까지 가겠다"고 배수의 진을 쳤다.

역설적으로 미중관계와 중일관계 속에서 한국의 전략적 위상은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한중관계는 지난 해 6월 한중정상회담 이후 순항중이다. 북핵문제, 장성택 사건 이후 북한문제, 경제교류, 인문교류 등 부문에서의 협력도 강화되고 있다. 특히 금년 1월 하얼빈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건립했고, 중국의 주요매체들이 안중근 특집을 제작하는 등 의도적인 조치들도 중국의 한국배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중국이 점차 한중 양자관계를 덜 의식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한국의 이어도를 포함한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면서 외교적 갈등을 낳았던 것이나 금년 1월부터 중국 하이난성(省)은 외국 어선이 남중국해에 진입하기 전 미리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일종의 '해상식별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조례를 발효시켜 주변국가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 한일관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현재 한일관계는 미·중·일 모두에게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은 역사문제에 대한 공동인식을 기반으로 일본의 행동을 규율하기를 원하고, 일본도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주의 가치연대를 도모하고자 할 것이다. 미국은 중국견제를 위한 한·미·일 안보협력을 제도화하는 데 있어 한일관계 악화가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보는 역사인식, 참회의식의 빈곤으로 지도국의 자격을 상실한 상태에서 한일협력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한국의 반대는 이를 웅변하고 있다.

일본이 흔들고 있는 중일관계는 한반도 정세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의 전략적 난도(難度)를 높일 것이다. 물론 일본 내에서 합리적인 시민사회가 등장하고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담화를 계승해 '정상의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는 정치적 견해가 등장하고 있으나, 아배내각의 질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역량을 총동원하는 중국도 '상처받은 민족주의(wounded nationalism)'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강하다. 이것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미중관계와 한미동맹 그리고 미일관계의 변화 속에서 한중관계도 출렁거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은 향후 10년 동아시아 판의 변화를 선제적으로 읽고 대응하는 외교가 필요하다. 중국 일각에서는 향후 10년내 우방국 공유론의 일환으로 한국을 설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미동맹의 틀을 유지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마냥 즐거운 러브콜만은 아니다. 지금의 동북아 국제환경은 구한말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물론 한국의 국력이 과거와 확연히 다르지만, 주변국의 국력환경도 급변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외교적 선택을 강요당하기 전에 통일의 실마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향후 동북아에서 한반도 안보이익을 확보하는 결정적 지렛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문제가 과도하게 정치화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한편 역사공론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사실 동북아의 영토와 역사문제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애국무죄'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고 정치가 민족주의를 동원하려는 유혹도 커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상호의존, 대화의 일상화를 추구하는 자유주의 공간은 현저히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원로학자인 모리 카즈코(毛里和子) 교수는 이러한 고민 끝에 신형(新型) 중일관계를 생각하는 연구자 모임을 결성했다. 악화일로를 치닫는 중일관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려는 지식인의 소명의식의 발로이다. 한국에서도 신형 한중관계, 신형 한일관계로 호응해 함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결국 지식인과 역사연구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