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태 외무장관 성명>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물이다. 해방과 함께 독도는 다시 우리의 품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모든 한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 영해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 김용식, 『새벽의 약속』에서 -
일석(逸石) 변영태는 대한민국의 제3대 외무부 장관 (1951.4.16 ∼ 1955.7.28)과 제5대 국무총리 (1954년)을 역임했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이 신생 독립국으로 출발하는 힘든 시기에 그는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내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매우 열악한 당시 대한민국의 외교 환경에서 변영태 장관은 우리 외교의 기초를 다진 사람이었다.
변영태 장관은 외국어에 매우 능통했는데, 이것이 외교관으로 활약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특히 그는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했다. 그는 영어를 1909년 서울 보성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접했고, 중국어는 고학을 통해 그리고 중국 유학을 통해 접했다. 이후 그는 장로교 선교사의 도움으로 1925년 중국의 협화대학(協和大學)에서 1년 동안 수학하였다. 성실함과 근면함을 무장한 변영태는 이 학교에서 수석으로 1년을 마쳤으나 학업을 그만두고 1943년까지 신흥중학교(新興武官學校)와 중앙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후, 1945년 고려대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가 1946년 이승만 대통령에게 발탁돼 외교관의 길에 들어섰다.
변영태 장관이 처음으로 이룩한 외교 업적은 필리핀과의 수교였다. 1949년 3월 3일 필리핀 정부로부터 한국을 승인하는 서명을 받아내면서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외 교섭의 첫 시도가 필리핀이었는데, 1949년의 필리핀은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앞섰다. 당시 한국에는 외교라는 단어조차 생소하였으며, 오찬과 만찬의 개념이 전무한 상태여서 외교관들은 미국 대사관의 책을 빌려 공부하였다. 또 의복도 변변치 않아 필리핀 시내를 돌며 정장을 겨우 마련할 정도였다.
변영태 장관은 외교 뿐 아니라 후학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능력 있는 인재들을 발굴하여 그 능력을 펼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연설도 많이 했다. 그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한명이 바로 지금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다. 변영태 장관은 늘 사람들에게 체력을 강조하였는데 그 자신도 아령운동을 사랑하여 해외 출장 때마다 빼놓지 않고 가져갔다고 한다. 국제회의 참가 후 귀국할 때 해외에서 수집한 문서들과 자료들을 가져오려면 짐이 많아 돈을 들여 짐을 부쳐야 했다. 부족한 여비에 돈까지 들여가며 짐을 부칠 수가 없어 교민에게 자신의 아령을 맡겨두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변영태 장관이 이룬 업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몇 가지는 오늘날 한국외교의 토대를 만드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그 중 무엇보다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을 들 수 있다. 변영태 장관은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정치회담에서 한국어를 공식용어로 채택하게 만들었다.
자체 통신망도 없어 미국 대사관의 통신망을 빌려 본국과의 업무회의를 하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도 초지일관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그가 제네바 회의에서 15개 통일 방안을 제시한 것은 오늘날까지 한국 통일정책의 근간이 되고 있다.
변영태 장관이 국제사회를 잘 볼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성 덕분이었다. 그는 작은 일 하나도 소홀히 하는 법이 없이 언제나 성실하고 치밀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영어 능통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에 보내는 성명서나 발표문을 직접 작성하면서 쓰고 지우고 읽고 고치기를 여러 번 거듭하였다고 한다. 김용식 전 외무장관은 작은 일 하나에도 전력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2014년 벽두부터 일본의 독도 도발이 시작되었다. 일본 중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개정에 따라 향후 일본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고유 영토'라거나 '한국에 의한 불법 점거'라는 표현이 들어가게 되었다. 2월 22일 시마네현의 소위 '다케시마의 날'에는 시마네현의 요구에 따라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내각 정무관(차관급)을 파견할 것이라고 한다. 이 행사에 일본 정부 인사가 참석하는 것은 지난해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일본의 독도 도발이 계속되면서 변영태 장관 재임시 이루어진 평화선과 일본에 보낸 구상서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평화선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1952년 1월 18일 국무원고시 제14호)"이다. 평화선은 당초에는 '어업 보호 수역' 선포를 목적으로 계획되었으나, 검토 심의 과정에서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으로 확대되었다. 1차 한일 어업위원회 회담에 참석한 당시 상공부 수산국장 지철근씨에 의하면 당시 한국 연안에 한국 어선보다 일본 어선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 어선의 한국 연안에서의 남획을 막고자 중남미에서 유행하던 해양자원보존과 대륙붕 선언을 한국에 적용하고자 '어업보호관할 수역'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처음에 이 선을 만든 상공부 수산국에서는 단지 어로 보호만이 목적이었다.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설정한 트롤 어업 금지구역 선을 기준 삼아, 되도록 일본의 반발을 막으면서 실리를 거두자는 뜻에서 독도를 '어업 관할 수역'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당시 외무부는 독도를 수역 밖에 두면 독도가 한국의 영토가 아니라는 그릇된 인식을 외국에 줄지 모른다는 이유로 독도 밖으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런 과정을 통해 당시 외무부는 독도를 '어업 보호 수역' 안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한국의 '어업 보호 수역' 안은 '변영태 안'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평화선'으로 재탄생되었다.
오늘날 독도에 대한 외교논리를 마련한 것 또한 변영태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독도에 대한 한국의 입장은 1954년에 정해졌다. 1954년 9월 25일 일본은 독도 문제를 ICJ에 가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한 달 뒤인 1954년 10월 28일 우리 외교부에서 반박 구상서를 작성했는데, 이때 독도에 대한 우리 외교의 논리가 정해졌다.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부탁하자는 일본 정부의 제안은 사법적인 가장으로서 허위 주장하는 또 하나의 기도에 불과하다. 한국은 독도에 대하여 시초부터 영토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권리에 대한 확인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구하여 한다는 이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런 분쟁이 없는데도 유사적 영토 분쟁을 조장하는 것은 바로 일본이다."
변영태는 독도가 영토문제가 아닌 역사문제라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 한국측은 구상서(1954.9.24)에서 "한국은 40년 이상이나 제국적 일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그의 권리가 약탈당하였다는 사실을 일본에게 환기시키는 바이다. 일본 정부가 분명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침략은 차차로 진행되다가 1910년 전 한국의 일본과의 병합으로서 그 정점에 도달하였다. … 시마네 현청이 독도를 자칭하여 그의 관할권에 포함시킨 것은 이러한 협정의 일 년 후다. 그리하여 독도는 일본 침략의 희생으로 된 최초의 한국 영토였다." 라고 주장했다. 1954년에는 "과거에 있어 일제 침략의 최초로 희생된 독도를 또다시 점유하려 함은 대일강화조약을 파기하고 한국을 재침하려는 의도의 발로로서 주시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라는 성명(외교부 불응성명, 1954년 9월 30일자 동아일보)도 발표했다.
1954년 일본에 보낸 구상서 및 성명은 14년 간 진행된 한일회담에서도, 현재도 한국의 독도에 대한 한국외교의 기본방침이 되고 있다. 당시 우리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더할 수 없이 명확했다. 한국 정부는 1954년 독도에 등대를 설치하고 '태극기' '한국령'의 표식을 설치했다. 당시 독도 주변 수역을 정찰하던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도 더 이상 독도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의 독도에 대한 원칙은 이 시기에 정립되었던 것이다.
변영태는 신생 대한민국의 외교의 정책을 수립하고 기초를 만드는데 매진했으며, 격동의 시대에 일본과 국익을 건 '외교전쟁'을 벌였다. 일본에 보낸 구상서를 한줄한줄 읽어보면 변영태 장관의 치밀한 성격, 의지와 신념, 그리고 한결같이 나라를 사랑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