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20대 왕인 장수왕(413~491)의 재위기간은 79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98세였다고 하니, 장수(長壽)라는 이름은 그에 걸맞은 시호(諡號)다. 장수왕이 왕위에 있던 5세기 동아시아 세계는 격동하고 있었다. 중원은 남북조시대로 북방에서는 선비족의 일부인 탁발부의 북위(北魏)가 세력을 팽창하면서 주변 국가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삼국사기』 장수왕대 기사를 보면 고구려에서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왜 그랬을까?
장수왕의 많은 업적 중에서 탁월한 외교능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장수왕 당시 고구려는 큰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새 수도인 평양에서 독자적인 고구려 사회문화를 창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구려와 북위가 외교적으로 조우한 것은 요서지역의 북연(北燕) 문제와 관련이 있다.
치밀한 외교적 대응으로 북위에 맞서다
고구려가 북위와 처음 접촉한 것은 장수왕 13년(425)이었다.『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보냈다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어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추정을 한다면, 북중국에서 강자로 떠오른 북위의 정세를 탐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0년 뒤 장수왕 23년(435)에는 사신을 보내 북위에 조공하였다. 북위도 이를 기쁘게 생각하였다고 전한다.
북위에서도 요동지역에서 제일 강국이 고구려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먼저 북위에 조공을 하였다는 것은 북위의 현실적인 위상을 인정한 것이다. 북위는 고구려에 책봉사신을 보내 장수왕을 책봉하였다. 북위가 굳이 책봉사신을 고구려에 보낸 것은 고구려의 사정을 엿보기 위한 의도였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북위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열었다.
고구려가 10년 만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고 관심을 기울인 것은 고구려와 서쪽 경계를 마주하고 있던 북연 때문이었다. 북연은 광개토왕 때도 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었다. 북연은 북위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으나 역부족이었다. 5세기 당시 북위는 화북(華北)지역 일대를, 북연은 요서지역과 하북(河北)지역을,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에게 북연은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 있는 완충지(Buffer Zone)였다. 북연이 약해지거나 망하면 북위 세력과 직접 대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북위는 요서지역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요서는 이 지역을 차지한 세력이 주변의 세력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점 역할을 하였으며, 다른 편의 입장에서는 요서를 통해 중국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장수왕은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북연을 공격해 오는 북위에게 위협을 느꼈다. 이러한 정세 속에 장수왕은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한 것이다. 장수왕으로서는 당시 국제정세에서 어떤 외교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고구려에 안전할 것인지 고민하였을 것이다.
고구려가 우려한 대로 북위는 436년 북연을 공격하였다. 북위는 고구려를 비롯한 주변 국가에 사신을 보내 북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장수왕은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장군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보내 북연의 수도 용성(龍城)에서 북연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북위군과 대치하던 고구려군은 북연왕 풍홍(馮弘)과 그 무리들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북위는 436년 북연을 멸망시켰으나 북연왕은 살아 도망간 것이다.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보내 풍홍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고구려는 "마땅히 연왕(燕王)과 함께 위(魏)의 교화를 받들겠다"는 표문(表文)을 바치면서 회피하였다.
한편 북연왕 풍홍은 고구려가 원래 지위에 맞게 자신을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반발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풍홍과 북연의 망명 집단을 분리하여,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 이는 고구려가 풍홍의 재기를 돕지 않는다는 외교적 신호를 북위에게 보낸 것이다. 북연 문제는 당시 매우 복잡하게 얽혔는데, 풍홍은 남조(南朝)의 송(宋)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맞아주기를 요청하였다. 남송은 고구려에게 풍홍을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장수들을 시켜 풍홍과 그 일가 1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군은 송의 군대와 충돌하였고, 고구려 장수가 죽었으나 결국 송나라 지휘관을 사로잡았다. 이 시점에서 고구려는 다시 한번 외교력을 발휘한다. 사로잡은 송나라 지휘관을 돌려보내 앞으로 송과 유대할 가능성을 남긴 것이다. 송나라 역시 이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남북조와 전략적 우호관계를 맺다
430년대 북연을 둘러싼 국제관계에서 고구려는 국가안전을 우선하여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시행하였다. 강·온 양면으로 외교정책을 구사하여 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장수왕이 북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풍홍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은 평양으로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고구려 내부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북연이 멸망한 후 고구려는 북위와 요서에서 국경을 마주하면서 긴장 상태로 지내다가 장수왕 50년(462), 23년 만에 외교관계를 재개한다. 이후 거의 매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는데 사신왕래가 정기화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린다. 그러나 북위는 유연(柔然), 남송과 전선을 두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가 조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또 고구려를 '나무랐다'는 말로 백제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수왕은 472년부터 475년 사이에 북위와 남송에 조공을 하였다. 이렇게 북위와 관계에서 안전을 확보한 후, 475년 9월에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하고 한강 유역을 함락시킨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장수왕은 남조, 북조와 맺은 외교관계를 당시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잘 운용하였다. '껄끄러운 이웃'인 북위에 주력하여 외교관계를 맺지만 남조의 송이나 제(齊)와도 외교관계를 맺었다. 장수왕은 북위, 북연, 유연, 남송, 남제와 '전략적인 우호관계'를 맺었다. 외교사적으로 볼때 장수왕은 당시의 복잡한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국가이익을 극대화시킨 빛나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