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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식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초청 전문가 토론회 "피해자가 원하는 해결방안 합의가 관건"
  • 조윤수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지난 8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은 "한·일 역사인식과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법을 묻는다"를 주제로 전문가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 출범 후,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 문제로 인해 한·일, 중·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종전 70주년인 2015년에는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들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끼쳤음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하는 '아베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만약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된다면, 한·일 관계뿐 아니라 일본과 아시아 관계는 파탄에 직면할 것이다.

현재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한·일 역사 갈등으로 양국 정상 간 대화가 끊긴지 오래다. 과거사가 양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한·일 양국은 교류 역사가 2000년에 이르는 이웃이고 동반자다. 이런 양국 관계가 역사문제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무랴아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학 명예교수를 초청하여 한국의 관련 전문가들과 함께 한·일 역사문제에 대한 토론의 장을 마련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아시아 공동의 자산

이번 토론을 통해 말로만 들었던 '무라야마 담화'의 당사자인 무라야마 전 총리의 발언을 직접 들을 수 있어 무엇보다 감회가 새로웠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90세 고령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열정적인 연설로 청중을 압도했고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연설은 무라야마 담화의 탄생부터 시작하였다. 1995년 당시 무라야마 총리는 자민당·신당 사키가케·사회당 3당 연립 내각의 수장으로서 이 내각에서 과연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첫 번째 임무이자 과제였다고 말했다. 총리가 되자마자 한국과 중국을 방문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게 신뢰받기 위해서는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과거사 청산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사회당의 수장이자 총리로서 전후 50년을 맞이하여 과거 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를 표명하는 국회결의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를 위한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를 중의원 본회의에서 1995년 6월 9일 가결시켰다. 그러나 이 결의는 자민당 반발로 만족할만한 내용이 되지 못했다. 참의원에서는 결의안 제출조차도 보류되고 말았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이 결의로는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으로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각의 결정에 기반을 둔 '총리담화'를 발표해 반성과 결의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결단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의 연설을 들으며 당시 내각의 담화 발표 과정도 험난한 것임을 새삼 느꼈다. 무라야마 총리는 담화를 낼 수 없다면 총사직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담화를 제안하자 다행스럽게도 내각은 전원 일치로 총리담화에 찬성했고 이에 '무라야마 담화'가 탄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무대신과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통산산업성대신,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자치대신 등이 강하게 지지해 준 것이 큰 힘이 됐다고 하면서 그들에 대한 고마움도 전했다.

'아시아여성기금' 실패에서 얻은 교훈

8월 22일 재단에 초청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한·일 우호를 위해서
(日韓友好のために)"라고
방명록에 남겼다.

무라야마 담화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일본 정부의 공식견해로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자민당 각료도 찬성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정부 역사인식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다. 무라야마 담화 이후 일본 총리들은 담화 문구를 원용하거나 계승한다고 표명하는 것으로 역사인식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현재 아베 내각에서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하겠다는 등 여러 말들이 나오고 있다. 무라야마 담화에 관한 평가가 다양할 수 있지만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이 한국을 비롯한 피해 국가들과 관계 속에서 발전시켜온 공동의 자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고노 담화 발표 후, 일본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 국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놓고 크게 두가지 의견 대립이 있었음을 무라야마 전 총리 기조연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자민당은 이 문제가 이미 한일회담으로 끝난 문제라고 주장했고 사회당 내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인권에 상처를 준 큰 문제이기 때문에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양쪽이 타협한 안은 정부가 보상할 수 없다면 국민이 대신 모금하여 보상하는 방식('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일본 내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시민단체와 정부도 이 기금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이 기금을 준비하고 관여한 사람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아시아여성기금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한국 측 이해를 얻지 못한 채 일본 내부에서 타협한 해결책을 실행한 것이 결정적인 잘못이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무라야마 전 총리와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깨달은 것은 피해자가 원하는 해결방안이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하고 결국 두 국가와 국민의 합의가 없으면 어떠한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전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의 기조강연에서 담화 탄생의 배경을 비롯하여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평소 신념과 지론을 솔직하게 들을 수 있었다. 토론회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학계, 언론계,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열띤 토론과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과연 현재 이렇게 어려운 한일관계를 어떻게 해결해 가는 것이 좋은 것인가? 이 자리에서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한·일이 2015년을 어떻게 맞이하는 것이 좋은지를 서로 고민하는 의미 있는 토론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