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중국 난징(南京)에서 상하이(上海)로 가는 고속철 안에서 앞에 앉아 있던 중국 분이 신문을 한 장 건네주었다. 〈동방조보(東方朝報)〉라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인데, '중국은 일찍이 당나라 때 조선을 도와 일본의 침략을 격퇴하였다'는 제목으로 푸단(復旦)대학 역사학과 한셩(韓昇) 교수의 인터뷰가 한 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리고 박스에는 역시 푸단대학 연구원이 쓴 만력조선전쟁(임진왜란)에 관한 평론과 전쟁 관련 사진이 5장이나 실린, 한·중 역사에 관한 특집이었다. 대충대충 읽어보다가 자꾸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며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한셩 교수가 한 인터뷰에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 먼저 인터뷰 제목에서 '도움'은 백강전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백강전투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신라를 도운 것이라고 한 점이다. 둘째, 신라가 조선반도를 통일한 후 당은 신라의 독립과 조선반도 통일을 "윤허"하였고 신라는 기미체제하의 독립국이라고 한 점이다. 당은 신라에 신라왕이 도독을 맡는 기미도독부로서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였고 기미체제 성립 후 온고하고 평화적인 관계를 건립했다는 것이다. 셋째, 한·중 관계는 신라 이래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평화우호관계를 유지했다고 서술한 점이다. 조선반도에 세워진 국가는 독립적이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가 보호한 '속국'이어서 중대한 외래 침략이 발생하였을 때 모두 한반도 국가를 보호했으며, 이러한 온정적 관계는 현재까지 1400여 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당 이래로 중국의 역대 왕조가 동아시아 국제관계 체계를 영도하였는데, 이러한 체계는 영도하는 국가에 확실히 이익이 있었다고 한 점이다. 만약 주변이 편안하지 않으면 백만 군대가 방위해야 할 뿐 아니라 군인이 발호하고 국내 정치가 불온해지는 내정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중국과 일본의 한반도 정책은 상반되었다는 주장이다. 당은 조공을 바치는 신라를 승인하고 경제·문화상으로 원조하였으나, 일본의 조선 정책은 시종 약탈성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반도를 대륙 공격의 발판으로 삼았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각축이 벌어졌으며, 조선반도가 그 폭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 갈등과 평온이 교차한 한·중 관계
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문제 삼는 이유는 신문은 대중이 읽는 매체여서 영향력이 크고, 그의 견해가 독특하고 사실과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백강전투를 당이 신라를 도운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663년 왜국은 백제를 돕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백강 어구에서 왜군은 당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대패하였다. 이 전투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한 전쟁의 연장선상에서벌어진 것으로, 백제의 지원군인 왜와 당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다. 네 나라가 벌인 동아시아 세계대전에서 당은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당사자였지 결코 신라를 돕는 지원국은 아니었다.100만을 동원한 태종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 고종은 백제를 먼저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하였다. 그러므로 백강전투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지 신라를 돕기 위해서 한 전투라고 볼 수는 없다.
당이 신라의 독립과 조선반도 통일을 "윤허"하였고 신라는 기미체제하의 독립국이라는 견해는 위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그 땅을 모두 차지하려 하였다. 그 때문에 신라와 두 나라의 유민, 부흥군이 연합하여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당군을 격퇴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비록 고구려의 고토를 상당 부분 상실하였지만, 당의 야욕을 꺾고 달성한 전취물이지 당의 윤허물이 아니다. 당이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도독으로 임명한 것을 두고 '기미' 관계로 규정하는 것도 무리다.
한·중 관계가 당 이래로 청일전쟁까지, 심지어 현재까지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왔으며, 한국의 역대 국가들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다. 고려를 세 번이나 침입했다가 마침내는 강감찬에게 참패하고서야 침입을 그친 거란, 고려의 궁궐을 불태워버리고 공민왕을 안동까지 파천하게 만든 홍건적, 조선에 침입하여 인조에게 감당할 수 없는 모욕을 안기고 숱한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 노예로 부렸던 호란은 우호의 표현이었던가? 침략이 아니더라도 조선 초기에 명과 17세기에 후금이 가했던 극심한 압박,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19세기 말 청의 압박은 우호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두 나라 관계는 전쟁과 평화, 갈등과 평온이 교차한 관계였지 시종 우호관계였다고 할 수 없다.
당과 그 이후 중원의 왕조가 주도한 국제관계 체계, 보통 조공-책봉체제라고 부르는 것이 중원 왕조에게 이익이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조공을 납부하는 국가에게도 일반적으로 이익이었다.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의 국가들이 중원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발전을 꾀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호만큼 중요한 역사진실에 관한 겸허한 성찰
중국과 일본의 태도가 상반되었다는 견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일본이 16세기 말 조선에 침입하여 7년간 전쟁을 치렀고 35년간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만 침략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열거한 사례 외에도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켰고, 수 양제와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여 자신의 영토로 만들려고 하였다. 중국사의 일부가 된원은 고려를 80년간이나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한반도의 역대 왕조는 침략과 경계의 대상을 늘 북방으로 설정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 가깝다. 두 나라 사이의 우호는 두 나라를 위해서 다행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도 무척이나 소중하다. 이를 증진시키기 위해 우호의 역사를 발굴하고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셩 교수 인터뷰의 의도도 한국사를 왜곡하거나 폄하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역사상의 우호관계를 강조하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시야를 넓혀 상대방을 함께 고려하여 살피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과 중국의 우호, 나아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미래의 평화는 진실을 겸허하게 성찰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때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