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역사Q&A
발해 보마성
  • 김은국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보마성 평면도

보마성은 현재 중국 지린성(吉林省) 안도현(安圖縣)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에서 서북쪽 4km의 보마촌(寶馬村)에 있다. 이 성의 발굴현황과 유물에 관한 설명은 《안도현문물지(安圖縣文物志)》(1985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마성은 평지성으로 동벽126m, 서벽 132m, 남벽 103m, 북벽 104m, 둘레 465m이며, 성벽과 성벽 기단은 돌로 쌓았고 윗부분은 흙으로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너비 4m, 높이 1.2m인 북벽은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다. 성 주위는 이미 경작지로 바뀌었으며 북벽 10m 밖에 보마촌으로 통하는 도로가 지나간다. 성 중간에는 흙기단 3개가 차례로 있다.

올해 여름 보마성을 발굴한 기관은 지린대학 변강고고연구센터다. 흙기단 3개 중 북쪽 기단을 중점 발굴하였고, 대상 면적은 726㎡다. 해당 발굴 책임자는 이곳에서 대형건축물 기초가 드러났고 이는 금나라 황실이 백두산에 제사를 올리던 신묘(神廟)라고 보았다. 중국이 보마성을 발해가 아닌 금나라 유적으로 보고 있다는 보도는 여기에서 비롯한 것으로 짐작한다.

발해가 축조한 후 청대까지 사용한 소중한 발해유물

그러나 《안도현문물지》에는 발해시대 축조한 뒤 요금시대 이후 청 말기 성안에 절을 세웠으며 성 서북쪽 모서리에 부도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는 발해부터 청대까지 연이어 이 성에서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일러준다. 특히 금나라를 세운 여진은 발해가 복속시킨 흑수말갈(黑水靺鞨)이어서, 이는 발해국 이후 여진이 그대로 계승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마성은 일찍이 발해시기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관할 흥주(興州)로 비정되기도 하였다. 이 성을 중국이 본격 조사한 것은 1978년이었으며, 이때 지압문 기와편이 나오자 발해성으로 판단하였다. 《안도현지(安圖縣志)》(1928년)에서도 성안 유물로 미뤄 발해시기에 축조하여 요금시기에도 사용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 발해시기 한 장수가 귀한 말을 얻었다는 설화와 함께 보마성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보마성 안내 표지석에도 발해국이 축조하고 금대까지 사용했다고 하니 보마성은 발해국의 소중한 유물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발해는 최대 도성인 상경성을 중심으로 사통팔달 교통로를 설치하여 주변국과 왕성하게 교류하였다. 보마성은 그 교통로 중 압록도(鴨綠道)의 주요 경유지로, 백두산 천지에서 북쪽30km 떨어져 있다. 중국은 2013년 보마성을 관할하는 서고성(西古城)을 중심으로 한 중경현덕부를 상경성과 함께 '국가 고 고유적 공원'으로 지정한 바 있다. 이와 함께 백두산과 그 주변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이번 보마성 발굴은 '백두산 보마성 종합계획'의 진행 과정 중 하나다. 구글 위성으로 이 지역을 보니 보마촌 주변 땅이 희고 멀겋다. 개발 바람으로 보마성이 지니는 발해시대 교통로로서 참의미를 놓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