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화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화폐에 호찌민(胡志明)이 등장한다. 수염을 늘어뜨린 인자한 할아버지 얼굴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호찌민은 여전히 베트남인들에게 위대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는 20대에 민족운동에 나섰으며, 1969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립투쟁과 정치의 일선에서 헌신하였다. 그는 현재 베트남을 이끄는 베트남 공산당 창당 주역이다. 프랑스의 지배를 물리치고 베트남 독립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기초를 만든 인물이었다. 그를 빼고 현대 베트남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호찌민이란 이름은 오늘날 베트남을 아는 중요한 열쇳말 중 하나다.
호찌민의 어렸을 적 이름은 응우옌신꿍(阮生恭)이다.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Hue) 인근의 유학자 집안에서 1890년에 태어났다. 그때는 조국의 운명이 이미 기운 상태였다. 1907년에 그는 후에에 있는 프랑스 학교에 들어갔다. 프랑스를 알아야 프랑스와 대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21세 때인 1911년, 프랑스로 가는 배를 탔다.
베트남 민족 해방을 열망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던 1919년, 그는 응우옌아이꾸옥(阮愛國)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베트남 독립 투쟁에 나섰다. 파리에서 안남 애국자 동맹을 이끌면서 파리강화회의 참가자들을 향해 베트남인들이 자립하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안남 인민의 요구사항'을 제출하였다. 그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기울어진 것도 이때였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식민지 민중의 저항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알았고 식민 본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식민지 민족운동이 결합할 때 베트남 독립의 길이 열릴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이 식민지 민족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밝혔을 때, 그는 주저없이 모스크바로 향했다. 1923년부터 18개월 동안 그곳에서 혁명가로서 자질을 길렀다. 그리고 1925년 베트남 국경에 가까운 중국의 광둥(廣東)으로 돌아왔다. 이곳으로 베트남 청년을 불러들여 많은 베트남 청년이 이곳에서 군사교육을 비롯한 혁명 활동에 필요한 능력을 키웠다. 그는 이들을 바탕으로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를 중심으로 베트남 공산당을 조직하였으며, 1930년과 1931년에 대규모 반프랑스 투쟁을 벌였다. 호찌민이 민족주의자인지 공산주의자인지를 두고 논란이 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질문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다. 그는 민족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민족의 해방을 추구하던 호찌민에게 그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던 것이다.
1931년 투쟁은 무참히 진압당했다. 호찌민 역시 여러 해 동안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1938년부터 다시 베트남 독립 투쟁의 최일선에 나섰다. 그는 중국 서남부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곳에서 동지를 모으고 국내 인사들과 연결하며 활동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941년 드디어 국경을 넘었다.
바로 이때부터 호찌민은 조국을 해방시킨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는 결정적 시기가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투쟁하는 조직으로 베트남 독립동맹을 결성했다. 유격대를 조직하고 북부 지역에 해방구를 만들었다. 도시와 농촌 곳곳에 조직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마침내 기회가 왔다. 첫번째 기회는 1945년 3월에 찾아왔다. 협의하며 베트남을 지배하던 프랑스와 일본의 관계가 틀어졌고, 일본군은 프랑스 군대를 패퇴시켰다. 갑작스레 식민통치기구는 느슨해졌고, 호찌민과 독립동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직을 급격히 확장하였다.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항복했다. 이때를 맞춰 호찌민이 이끈 베트남 독립동맹은 혁명적 봉기를 호소했다. 하노이(Hanoi)를 비롯한 수많은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독립동맹 측인사들이 권력을 인수하였고, 여러 해 동안 힘써 길러온 독립동맹의 군대도 하노이로 들어왔다.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열광하는 군중들 앞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 창건을 선포하였다.
지도자로서 베트남 민중의 승리를 이끌다
그러나 공화국 앞에 놓인 과제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연합국의 합의에 따라 16도선 남쪽은 영국이, 그 북쪽은 중국이 점령하여 독립 사업을 방해했다. 게다가 일본군에 패해 쫓겨났던 프랑스가 다시 옛 지배자 자리로 돌아왔다. 미국은 공공연하게 영국과 프랑스를 도왔다. 이제 겨우 정부를 수립했으나, 공화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었고 상대할 적은 강대하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호찌민의 활약은 다시 빛났다. 그는 국제정세에 관한 통찰력과 함께 피아의 역량을 냉정하게 평가하여 전쟁과 협상이란 양면 전술을 적절히 구사하였다. 1946년 호찌민은 프랑스와 손잡고 중국을 국경 밖으로 내쫓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요구를 일면 수용하여 프랑스 연합의 일부로 독립한다는 절충안을 만들어냈다. 결국 이 타협안이 깨졌을 때는 단호하게 반프랑스 투쟁을 조직하였다.
1946년부터 8년간 베트남은 프랑스와 전면전에 가까운 독립 전쟁을 치렀다. 세계적인 강대국에 맞선 이 투쟁에서, 독립을 향한 베트남인들의 투쟁의지는 유감없이 과시되었다. 1954년 5월에는 베트남 군대가 프랑스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식민지가 종주국과 맞붙은 대규모 전쟁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승리였다. 프랑스는 이제 베트남을 떠났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흔들릴 수 없는 지위를 획득했다. 호찌민을 지도자로 한 베트남 민중들의 역사적인 승리였다.
물론 1954년의 독립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한 반쪽의 독립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분단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그 후 20여 년동안 또 다른 전쟁으로 고통 받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반프랑스 투쟁의 승리가 빛이 바랠 일은 아니다. 호찌민에 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1954년 이후 베트남 공산당이 이끌었던 몇몇 정책은 그때나 그 후에나 상당한 논란에 휩싸였다. 토지개혁과 인민공사화가 좋은 예다. 그러나 그 정책의 실패 여부와 별개로 호찌민은 예나 지금이나 베트남인들에게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