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나라, 발해! 과연 무엇이 떠오르나? 발해는 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로 명명되는 그야말로 한국사의 당당한 일부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금수만도 못한 나라라고 하면서 단교한 뒤 고려로 망명하는 발해 유민들을 따뜻하게 포용하였다. 발해 유민들은 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고려에 원조를 요청할 정도였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합과정에서 발해 유민들에게 인적, 물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연구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 발해 유민과 고려는 기존의 남북국시대(신라와 발해)의 범위가 확장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사극 '대조영'은 여전히 한류의 대표 작품으로 꼽힌다. 지금도 세계 여러 해양을 누비며 당당히 한국 해군의 위상을 보여주는 군함 '대조영함', 필자도 함께 작업한 바 있는 고왕 대조영 어진도 최근 선보였고, 대조영 기념우표도 이미 발행된 바 있다. 이렇게 친숙한 이름인 '대조영'은 발해의 건국자요 발해의 구심점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새삼 전제해야 할 것은 용어 문제다. 먼저 초기 발해는 정식 국호인 진국으로 불러야 하며, 대조영은 그 시호인 고왕(高王)으로 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왕으로 제대로 부르는 것이야말로 한국사로서 발해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에서 발해는 아직 그 여정을 마치지 않았다.
초기 국명은 진국, 대조영은 '고왕'으로 불러야
발해 역사 관련 기록은 발해와 교류한 국가들이 정리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중원(중국) 사료에는 고왕이 동모산(東牟山)에서 진국이라는 이름으로 건국하였다고 하여 발해 초기국명이 진국이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중국학자들은 초기국명을 진국이 아닌 말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나라에서 진국에 사신을 보내 고왕을 발해군왕에 책봉하였다는 것과 이를 계기로 진국이 말갈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한다. 여기에 더해 중국학계는 당나라 사신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우물을 파고, 돌에 관련 내용을 적어 남긴 이른바 홍려정(鴻臚井) 석각에서 근거를 찾는다. 문헌이든 석각이든 공통으로 나오는 '말갈'이 바로 고왕의 첫 국호였다는 것이다. 중국학계는 관련 방증으로 일본에서 발견된 8세기대 석비 속 '말갈'과 최근 몽골에서 발견된 돌궐계 무덤 묘지석에 등장하는 7세기 초 '말갈' 용어를 통해 재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이들 기록들은 그야말로 "그들만의 기록"이요 해석이다. 실제로 일본의 비석은 8세기 후반으로 발해라는 국명이 널리 쓰이던 시기고 또 몽골 발견 묘지석 내용은 발해 건국 전, 고구려 유민 부흥 시기에 관한 것이어서 무리하게 방증자료로 제시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문헌 기록조차 부정하면서까지 고왕 시기 발해 초기 국명을 말갈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우선 문헌 자제가 발해 중심이 아닌 당나라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언급한 대로다. '말갈'이란 용어는 당시 중원에서 주변 민족들을 비하하여 사용하던 중국 중심 명칭이었다. 그런데도 고왕이 스스로 '말갈'을 초기 국호로 삼았을 리 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말갈'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당시 당나라의 큰 골칫덩이 중 하나가 말갈 처리 문제였다. 사서에 보면 말갈은 발해 이전부터 고구려 군영에 속하여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당나라에 큰 타격을 입힌 것으로 나온다. 대표적으로 안시성 전투에 고구려 지원군으로 말갈 병사들이 참여한 사실이 있고 또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이 몰래 말갈과 연합하여 당나라에 다시 저항하는 등 말갈은 당나라에게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끝나지 않은 해동성국 발해의 여정
고왕 대조영은 영주(營州, 현재 요녕성 朝陽)에서 거란의 대당 항쟁과 같은 시기에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 천문령(天門嶺)에서 당 군을 격파하고 동모산에서 '진국'(振 또는 震)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가능하였던 배경을 좀 생각해 보면, 우선 영주에서 벗어나 동모산에 정착하여 건국하는 과정이 우연이 아니라 준비된 것이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발해 건국은 고구려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고구려 멸망 후까지 이어진 결과다. 발해 건국이 가능하였던 것도 이들 유민이라는 인적 자원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동모산을 중심으로 한 진국 세력'과 '영주 지역의 대조영 집단'이 고구려 멸망 후 30년간 상호 교류했던 것이다. 결국 두 세력의 공조가 흩어져 있던 유민을 결집하고 진국이라는 국호를 지닌 나라로 당당히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왕 대조영은 한 마디로 '고구려 유민 디아스포라의 종결자'라 할 만하다. 초기 국명이 진국인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의 결집임과 동시에 흩어져 있던 한민족을 다시 모은 디아스포라 한국사의 출발인 것이다.
지금 발해의 역사 영역은 비록 중국 동북지방과 러시아 연해주에 있지만, 이곳에서 나오는 유적과 유물들은 우리 역사의 남북국시대를 증명하는 문화유산이다. 이제는 중국학계도 러시아처럼 중국 내에 산재한 발해 유적을 한중 양국이 공동으로 조사할 수 있도록 통 큰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다. 러시아 연해주 발해 유적을 한국과 러시아 양국이 20년간 성공적으로 공동 발굴한 것처럼 이제 중국과 북한에서도 이런 공동 조사를 기대하고 있다. 사통팔달로 뻗어나갔던 해동성국 발해가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고왕 대조영의 동모산, 그 자리에서 선포한 진국 발해! 언젠가 발해인들이 스스로 남긴 문헌 기록이 빛을 볼 때, 한민족 디아스포라는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