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실린 윤관(尹瓘, ?~1111) 열전은 여진 정벌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고려는 숙종과 예종 때 두 차례에 걸쳐 여진 정벌을 시도하였다. 두 차례 모두 윤관이 나서서 여진과 싸웠다. "군대를 통솔하여 적의 성을 부수고 강토를 넓혀서 나라의 치욕을 씻겠습니다." 숙종과 예종의 측근이었던 윤관은 여진을 정벌하여 강역을 넓히려는 꿈을 꾸었다.
여진은 고려 동북쪽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원주지에 살면서 고려에 의탁하는 사람이 많았고 고려로 이주하여 귀화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려는 이들에게 가옥과 토지를 내려 생활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숙종 때 완옌부(完顔部)가 여진족 전체를 통합하기 시작하면서 정세가 변하였다. 완옌부의 우야슈(烏雅束)는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을 경략하고 고려에 의탁하려는 여진인을 막았다. 이로써 고려와 여진이 맞서게 된 것이다.
1104년(숙종 9년)에 여진 기병이 동북면 정주(定州)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 숙종은 임간(林幹)을 보냈지만 패하였다. 다시 윤관(尹瓘)을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으로 임명하지만 윤관도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윤관은 전쟁에서 패한 까닭이 기병 위주인 여진군을 보병 중심인 고려군이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여진에 대항하고 문신귀족 억제 위해 군사기반 강화
숙종은 윤관과 함께 대규모 정벌 계획을 세웠다. 전쟁을 통하여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고 전시체제를 이용하여 문신귀족을 장악하려 하였다. 숙종은 윤관의 건의에 따라 별무반(別武班)이라는 특수 군단을 창설하였다. 귀족과 양인 농민을 중심으로 기병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을 조직하였고, 승병으로 항마군(降魔軍)을 삼았으며 그 밖에도 특수병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축적하며 여진을 공격할 전략을 수립하였다.
별무반을 동원한 전쟁은 숙종을 이은 예종 때에 일어났다. 여기에는 문신귀족 세력을 억제하려는 예종과 윤관의 의도도 숨어 있었다. 1107년(예종 2년) 말에 왕은 윤관을 원수로 삼고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17만 대군을 지휘하였다. 여진의 전략 거점인 135곳을 함락하였으며 5,000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윤관은 정주를 지나서 함흥평야 일대를 점령하고 마운령을 넘어서 길주에 이르렀다.
윤관은 점령지에 장수를 보내어 9성을 쌓고 강역을 정하였다.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와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았다. 공험진에는 비석을 세워서 고려와 여진의 경계로 삼았다. 이듬해에는 함주에 대도독부를 설치하여 요충으로 삼았고 영주 등 4주와 공험진을 방어주진으로 편제하였다. 이어서 의주(宜州), 통태진(通泰鎭), 평융진(平戎鎭)에도 성을 쌓았다. 이렇게 쌓은 주와 진을 이른바 '윤관의 9성'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남쪽 지방에 살던 백성을 옮겨 와 살게 하였다. 9성의 위치와 점령지의 범위에 관하여는 여러 학설이 있다. 대체로 마운령 부근까지 함경도 지방에 9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또 두만강을 넘어 그 북쪽까지 세력이 미쳤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윤관의 9진 개척, 고려 영토 인식 확장에 기여
그런데 윤관은 개선한 지 3개월 만에 다시 전장으로 가야 했다. 여진의 반격으로 점차 9성을 방어하기가 힘들어졌다. 개척한 땅이 넓고 9성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수비에 어려움이 컸다. 이번 출정에서 윤관은 여진을 평정하지 못하였다. 이 무렵 여진은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강화 교섭에 적극적이었다. 9성을 돌려주면 계속하여 고려에 조공을 바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고려에서는 여진과 전쟁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여 9성을 돌려주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여진과 화평 관계를 맺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1109년(예종 4년) 7월에 고려는 9성을 돌려주기로 결정하였다. 윤관이 앞장선 여진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영토를 개척하여 고려의 강역을 넓히려던 꿈은 사라졌다. 여러 문신귀족이 싸움에서 패한 윤관에게 죄를 추궁하였다. 예종은 윤관에게 내렸던 공신 칭호를 박탈하고 관직에서 해임하였다. 하지만 다음 해(1110년) 왕은 윤관을 복권하여 명예를 회복하여 주었다.
1111년(예종 6년)에 윤관은 세상을 떠났다. 4년이 지난 뒤 여진은 금나라를 세웠다(1115년). 금나라는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다. 고려와 금은 군사대결 없이 형제 맹약 단계를 거쳐 책봉·조공 관계를 맺었다. 두 나라가 평화 관계를 유지한 것을 신채호는 윤관의 공로라고 풀이하였다. 윤관이 여진과 일전을 치룬 공으로 금나라가 한 번도 고려를 침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본 것이다. 또 윤관이 9성을 개척한 경험은 고려의 영유권 인식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368년(공민왕 5년)에 동북면을 수복한 뒤 고려는 북쪽의 함흥, 길주 일대까지 차지하였다. 명나라를 상대로 길주 인근까지를 고려의 고유한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일찍이 윤관이 북쪽 길주까지 9성을 설치하였던 일이 고려의 영토 인식을 넓히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