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은 2006년 설립 후 지금까지 매년 러시아 극동 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와 공동으로 크라스키노 발해 염주성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크라스키노는 현재 러시아 연해주 남단지역으로 19세기 후반 조선인들이 마을을 형성한 곳이다. 당시 이 마을 이름은 옌추 또는 연추로 불렸으나, 러시아가 동방으로 진출한 후 크라스키노로 바뀌었다. '연추'는 발해국 시절 '염주'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발해 62개 주 중 하나였던 염주(鹽州)의 소재지는 '신라도(新羅道)'와 '일본도(日本道)'로 이어지는 관문이었다. 현재는 츄카놉카강 곧 염주하와 포시예트만이 만나는 곳에 있으며, 둘레 1.2km 정도인 평지성을 이루고 있다.
7월 15일 크라스키노 마을에 도착하여 이틀 뒤 선현과 하늘과 땅에 고하는 개토제를 지내는 것으로 발굴을 시작하였다. 항상 많은 성과를 기대하며 발굴을 시작하지만, 역시 결과는 직접 땅을 파 보고 흙을 걷어내봐야 드러나는 것이다.
발해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기록물은 손에 꼽을 정도여서, 매년 발굴을 시작할 때마다 문서와 기록이 담긴 타임캡슐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지금까지 염주성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기록 유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것 자체가 즐겁다. 언젠가 반드시 찬란했던 발해국의 당당한 위상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록이 궤짝 몇 개 분량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기대.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한러가 공동 발굴하며 공유하는 무언의 사명인 것이다. 사명! 발해 유적 중 문헌에 명칭이 남아 있고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염주성에서 그 역사의 명을 기다리는 학자들의 염원은 이미 산천과 잔잔히 교감하고 있었다.
심화와 확대 발굴의 조화
염주성은 '염주하'라는 강을 뗏목으로 건너 잰 걸음으로 20분 정도 가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발굴 구역과 성으로 가는 길, 그리고 성 안 지천에 널브러져 있는 푸른 초목에서는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19세기 두만강을 건너 이곳을 터전 삼아 삶을 일구었던 동포들은 1930년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현장이다. 성으로 가는 길에 도열한 갈대와 쑥대밭은 돌고 돌아 다시 이곳을 찾은 발해 후손에게 천년의 향과 바람에 실어 무언가를 전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20여 년 전 처음으로 한·러 공동발굴을 시작한 후 올해는 심화와 확장 발굴이 조화를 이루며 좋은 성과를 거뒀다. 심화 발굴 결과 올해 처음으로 발해 전체 시기 토층을 확인하였는데, 이 토층은 발해 건국부터 멸망기까지 발해 역사는 물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 사료다. 또 성 전체를 대상으로 지표조사하고, 그동안 거듭 확인한 행정 중심 구역으로 발굴을 확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청동 낙타상, 편병 등 소중한 발해인의 유물을 출토할 수 있었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살한 뒤 "만세! 만세! 만세!"를 외치며 감격을 표현하였다. 그 안중근 의사가 열혈 동지 11명과 함께 거사를 위해 무명지를 끊고 혈서를 쓰며 동맹을 맺은 곳이 바로 이곳 크라스키노 마을이다. 발굴단은 본격 발굴을 시작하기 전, 단지동맹 기념비와 그 터를 방문하여 예를 갖추고 선현의 넋을 기리며 발굴의 성공을 기원하였다.
그리고 보름 후, 마침내 안중근 의사의 만세처럼 짜릿한 즐거움을 맛보았다. 발해 유적에서는 최초로 '청동으로 만든 낙타상'을 출토한 것이다. 이 낙타상은 2012년 출토한 낙타 뼈와 함께 발해가 염주성을 통해 서역과 교류하였음을 방증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크기는 무명지 한 마디 정도지만, 발해의 장인은 쌍봉낙타 형상을 그 작은 크기에 온전히 담아 표현하였다. 한 달여 간 땀으로 범벅이 되고, 작열하는 태양에 피부가 까맣게 탄 뒤에야 염주성이 발굴단의 간절한 기다림에 답을 준 것이라고 모두들 감격해했다.
남북 잇는 기차 타고 염주성을 발굴하는 꿈
그 외에도 올해 염주성 발굴에서는 발해에서 공동 저장시설 공간을 설치하고 생활하였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또 편병 한 점이 나왔는데, 이는 발해와 신라 장보고 선단이 염주성을 거점으로 바다를 통해 교류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지난해에 이어 염주성이 상경성과 같이 도시구획을 하고 도로를 낸 도성임을 재확인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2016년은 염주성 공동 발굴을 시작한 지 꼭 10년이 되는 해다. 아울러 재단 출범도 10주년을 맞는다. 이에 그간 거둔 발굴 성과를 정리하고 한러 학자가 참여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재단이 추진하는 염주성 공동 발굴은 동아시아 발해 유적 발굴의 이정표가 되어 왔다. 이런 성과를 토대로 중국 내 발해 유적을 한중이 공동 조사하는 것과 북한의 발해 유적 역시 남북학자가 함께 발굴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남북 철도가 빨리 이어져 '신라도'를 거쳐 두만강 건너 염주성까지 왕복할 날을 학수고대한다.
염주성 발굴지를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 염주성 들판과 산천에 첫날처럼 정성스레 공양을 올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귀국길에 오르는데 염주성 들판을 울리던 천둥과 번개, 쏟아지는 장대비가 '잘 가게! 또 오시게 발해 후손들이여!'하고 배웅하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