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1880~1936)의 사상과 민족운동에서 아나키즘의 수용은 매우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신채호는 3·1운동으로 분출한 민중의 힘을 목도하며 역사 변혁의 주체로서 민중을 인식하였고, 절대독립의 민중직접혁명론을 지니며 그에 합당한 사상으로서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단재는 1923년경 스스로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자처하였다. 그가 그해 기초한 의열단 선언문 '조선혁명선언'은 아나키스트로서 출발을 의미한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아나키스트로서 단재의 면모는 이후 발표한 논설과 문학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아나키즘 수용은 독립 이념과 방법의 주체적 변용
그런데 아직도 신채호를 아나키스트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거나, 아나키스트로 평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그의 아나키즘 수용을 민족운동에서 이탈한 것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그것은 분명한 오해다. 단재가 아나키즘을 수용한 것은 그 자신이 말한 대로 '주의(主義)의 선변(善變)'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는 사상에서 교조주의를 맹렬히 비판하였고 민족의 현실, 즉 독립운동의 조건과 상황에 맞도록 사상을 주체적으로 변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단재가 변해도 될 것으로 말한 '신(身)과 색(色)'은 아나키즘 사상과 운동이며, 변하면 안 되는 것으로 강조한 '법(法)과 골(骨)'은 민족주의에 기초한 독립정신과 독립운동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자신이 '조선의 크로포트킨(Kropotkin)'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단재의 아나키즘 수용과 운동을 민족주의라는 틀 속에 고정시키는 것은 그의 광대한 사상과 민족운동을 좁게 만들 우려가 있다. 무엇보다 아나키스트로서 단재를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바로잡혀야 한다. 그렇다고 그를 순연한 아나키스트라거나 심지어 그가 아나키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민족주의를 수단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지나친 논리다. 요컨대 신채호의 아나키즘 수용과 운동은 그가 이미 경험한 독립운동 이념과 방법론의 주체적 '선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아나키즘을 수용한 단재는 절대독립론과 민중직접혁명론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방민족연대론'을 구상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는 아나키즘의 주체적 수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의 사상과 독립운동론에서 커다란 변화였다. 단재는 당시 일제가 주장한 동양주의나 '아시아연대론'이 지닌 제국주의적 야욕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 민족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아시아연대론은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아시아 지배를 추구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아시아주의, 아시아연대론, 대동아공영권으로 불리는 일본의 지역협력이나 통합 구상은 일제가 벌인 해외 식민지 팽창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이론이었다. 반면, 아시아주의나 연대론의 이념과 당위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가지고 있던 현실적 이해와 상충하고 모순되는 것이기도 했다.
'동방피압박민족연대론'의 내용과 실천
단재는 일제가 주장한 동양주의와는 근본부터 다른, 조선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논리로서 '동방민족연대론'을 주장하였다. 1920년대 들어서면서 그는 조선독립이 중국의 이해뿐 아니라 동양평화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고 한·중 우호와 연대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동방민족연대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민중을 '강국의 민중'과 '식민지의 민중'으로 양분하고, 식민지·반(半)식민지 민중의 연대를 주장하였다. 일부에서 일본의 무산 민중들과 연대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일본의 무산 민중을 제국주의 지배자와 똑같은 존재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단재의 '동방민족연대론'은 우리가 연대해야 할 대상으로 세계 무산 대중 가운데에서도 동방의 식민지 민중을 상정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을 철저히 배제한 오직 식민지·반식민지 동방피압박민족연대론이었다.
단재는 '동방피압박민족연대론'을 실천하기 위해 1926년 여름경부터 아나키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7년 9월 베이징에서 조선과 중국 등 7개국 대표가 모여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을 결성할 때, 조선 대표로 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회의의 결의사항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1928년 4월, 텐진에서 '한인무정부주의자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그가 기초한 '선언(宣言)'을 채택하였고, 연맹에 선전기관을 설치할 것과 러시아와 독일의 폭탄 제조 기술자를 초빙하여 베이징 교외에 폭탄 제조공장을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천을 위해 자금 조달에 나섰다. 베이징우체국 외국위체계에 근무하던 타이완 출신 아나키스트 임병문과 협의, 액면가 6만 4천 원에 달하는 외국 위체 2백매를 위조 인쇄하여 일본, 대만, 조선, 관동주 등 중요 32개 우편국에 발송하였다. 또 동지들과 함께 지역을 분담하여 위체를 현금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자신은 타이완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자금 마련이라는 부푼 마음을 안고 1928년 5월 8일 타이베이 지롱항(基隆港)에 내려 인근 지롱우체국 창구에서 돈을 찾으려다가 미행해 온 일본 수상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다롄(大連)으로 압송당한 그는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8년 순국하였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그는 자신이 의심할 바 없는 아나키스트라고 강조하였다. 그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 아나키스트 서적이었으니, 그가 임종 순간까지 아나키즘을 신봉하였음을 알려준다.
단재 신채호, 그는 '조선의 크로포트킨'이 되어 독립을 추구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동방피압박민족의 식민지 - 반식민지 모순을 타파하고 동양 평화를 이루고자 한 진정한 동방의 혁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