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이 쏟아지는 주말 경복궁은 휴일을 즐기러 나온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분주한 공간이다. 광화문을 지나면 마주하는 웅장한 근정전(勤政殿), 우아한 경회루(慶會樓)에는 아름다운 고궁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는 인파로 늘 북적인다. 그러나 이 궁 북쪽 끝자락에 아픈 우리 역사가 남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1873년 고종은 경복궁 궐내 깊숙한 곳에 양반 가옥을 응용한 250칸짜리 건물을 짓게 한다. 건청궁(乾淸宮)이다. 맑은 하늘을 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이름 붙였을 이 처소는 사랑채인 장안당과 안채인 곤녕합을 비롯해 여러 부속 건물들을 거느리고 있다. 고종은 1884년 부터 건청궁에서 기거하기 시작했으며, 1887년에는 이곳에 국내 최초로 전기를 가설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결코 맑지도, 밝지도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고, 조선 왕실은 친러·배일 정책을 추진해 일본을 고립시키려 했다. 1895년 9월, 일본은 조선에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새로 파견해 배일정책의 진원지로 지목한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 2개 대대와 낭인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건청궁에 난입했다. 한 무리는 고종의 침소인 장안당으로 가서 고종에게 왕비 폐출 조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고, 다른 한 무리는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붙잡아 무참히 시해한 뒤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른바 '여우사냥'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전이 막을 내리기까지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겨우 수습한 명성황후의 시신 일부는 시해 2년 뒤인 1897년 청량리에서 처음 장사지냈으며, 1919년 경기도 남양주 홍릉으로 이장하여 고종 곁에 묻혔다. 건청궁도 1915년 일제 조선총독부가 물산공진회를 개최할 때 철거했다가 2007년 10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조선의 심장과도 같은 궐내에서 일어난, 차마 믿기 어려운 이 참극 이후 고종과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 촛불 신세였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건청궁 곤령합을 찾은 날. 때마침 한 무리 일본인 관광객들이 이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역사의 시계가 120년이나 흘러버린 오늘, 그들은 과연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는 이곳에서 또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걸까?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을미사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0686&cid=46623&categoryId=46623
독립기념관 《서울 독립운동 사적지》 - 경복궁 옥호루
http://sajeok.i815.or.kr/ebook/ebookh01/book.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