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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다
  • 글 양미강 (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상임공동운영위원장)

2015년 달력도 마지막 장만 남았다. 한일협정 50주년, 해방 7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해, 경색된 한·일 관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리라는 일반 시민들의 기대는 여전히 유효한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후 더욱 침체했던 한·일 관계는 지난 6월 한일협정 50주년을 맞아 양국 정상이 기념식에 교차 참석하는 것으로 새로운 물꼬가 트일까 기대를 모았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1월 아베 총리와 정상 회담을 했다. 그러나 현안인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난기류를 형성하고 있고, 한·일 양국 사이에 좁혀지지 않은 인식 차는 국장급 회의를 통해 과연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한·일 관계의 미래가 불투명했던 지난 8월 말,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채택결과가 드러났다.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들의 추산에 따르면, 일본 우익교과서인 이쿠호샤 교과서의 채택률은 역사 6.5%, 공민 5.7%이다. 이것은 2001년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인 후쇼샤 교과서가 0.039%였던 것과 달리 놀랄만하게 상승한 수치다. 내용면에서도 독도 문제는 역사와 공민, 지리 모든 교과서에 실렸고 그 내용도 예전보다 강화되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지난 14년 동안 점차 기술이 줄어들더니, 올해 검정을 신청한 마나비샤 외에는 모두 기술하지 않았다. 이쿠호샤 공민교과서는 아베 총리 사진이 12회 이상 게재되는 등 아베 정권의 홍보물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의 역사는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1997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왜 이들이 교과서에 주목했을까? 왜 역사와 공민교과서였을까? 일본 우익들의 문제 인식은 일본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그 주된 원인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강조하는 자학사관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자랑스러운 일본인 상과 자학사관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고, 일본인에게 직접 자긍심을 심어주는 교과서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1997년부터 2015년까지 약 20년 동안 일본 우익세력들은 그들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고 일부 성과도 있었다. 후지오카 노부카스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만드는 모임'을 창립하면서 30년 후를 내다보고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바가 있다.

일본 우익교과서 채택률 상승을 문제 삼는 까닭

우익세력들에게 교과서는 미래세대 교육을 주도할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2015년 들어 평화헌법 개정과 집단자위권, 안보법을 강행처리하는 아베 정권 하에서 일본 우익교과서의 채택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올해 이쿠호샤를 신규 채택한 지역은 총 19개 지역인 반면, 기존의 5개 지역은 이쿠호샤에서 다른 교과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올해 채택률이 늘어난 이유는 요코하마시와 오사카시가 대규모로 이쿠호샤 교과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의 채택 과정은 학교와 선정위원회가 올린 순위를 무시한 채 지자체장이 독단적으로 채택을 한 대표적 사례다. 한·일 시민단체들과 요코하마시와 친선관계를 맺고있는 인천광역시가 요코하마시 교육위원회에 한·일 친선을 가로막는 이쿠호샤 교과서를 채택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전달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 시민단체는 13만여 명이 서명한 서명지를 직접 전달했으나 그 역시 문전박대 당했다.

우리는 왜 일본의 우익교과서 채택률 상승을 문제 삼는가? 가장 큰 이유는 우익교과서가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안보법의 교육적 기반이라는 점이다.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을 가르치지 않는 교과서, 일본 정부 주장만을 내세워 영토 문제를 가르치고, 심지어 한국이 독도를 무단침탈하고 있다고 가르치는 교과서, 집단자위권은 정당하다고 가르치는 교과서로 배운 일본 청소년들이 한국 청소년들과 어떤 면에서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을까?

이제 우익세력들은 도덕교과서에 도전할 준비를 하고 있다. 국민 정신 개조의 핵심인 도덕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것을 보니, 역사와 공민 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상호 이해와 협력보다는 애국심으로 무장하는 역사 교육은 갈등만 조장할 뿐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지 못한다. 남북 분단, 핵 문제, 안보 문제 등 위험 요인이 많은 동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야말로 지역의 불안 요인을 감소시킬 수 있도록 자국주의가 아닌 평화주의에 기반을 둔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평화 관점으로 역사를 생각해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치지 않는 한중일 시민들의 헌신

갈등과 대립이 심각해지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한·중·일 시민단체들이다. 지난 2001년 일본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될 때부터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한·중·일 3국 시민들이 모여 역사인식에 관한 포럼을 개최하고, 한·중·일 청소년들을 위한 역사캠프도 개최한다. 또 대립과 경쟁이 아닌 평화롭게 공존하는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며 한·일, 한·중·일 공동 역사교재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대화하고 있다.

아울러 각국 역사교육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서로 연대하여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어느 한 편이 일방 주도하는 것이 아닌 상호협력에 바탕을 둔 자발적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 배우고 이해하게 만든다. 시간과 노력, 재능과 헌신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한·중·일 시민단체들의 평화를 향한 활동은 지치지 않고 이어진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욱 견고하게 연대감을 확인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각국 정부들이 대립과 갈등으로 넓혀놓은 간극을 메우는 일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 승리하는 일이다"는 일본 시민단체들의 외침이 허공을 치지 않고 가슴을 울리는 것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한·중·일 시민단체들의 절실함과 어우러진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아무리 조건이 힘들어도, 꿋꿋이 어깨를 마주하며 함께 갈 친구들이 있어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