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 조선은 집권세력인 동인과 서인 간 정권 다툼으로 붕당정치의 정쟁이 심하여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물결에 부응하여 세력을 키워 대륙에 침략을 꾀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는 일본 천하를 제패하고 대륙 침공 작전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흔든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는데, 초반에는 일본의 승세가 한반도 전역에 미쳤으나 전라부대를 이끈 이순신이 일본군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고 해전에서 연승함으로써 결국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1588년 일본이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를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자, 1590년 조선은 일본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이들이 돌아와 선조에게 보고하는데 전쟁설을 두고 서로 다른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온 서계(書契)에 들어 있는 "이듬해 2월 명나라로 곧장 향하려 한다."는 내용은 조선을 긴장하게 하였다.
해전과 육전 어느 쪽도 폐할 수 없다
조선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에 장수감이 될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유성룡이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라좌도수사에 임명하게 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순변사 신립(申砬)의 건의에 따라 수군을 파하고 육전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해구(海寇)를 차단하는 데는 수군만한 것이 없으니, 해전과 육전을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습니다"고 하자, 조정에서 이를 따랐다.
히데요시는 가장 사랑하던 맏아들 쓰루마쓰(鶴松)가 죽자 전쟁을 선포하고, 명나라 정벌 기일을 '1592년 3월 1일'로 정했다. 이순신은 1592년 정월부터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각 진영에 무기를 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전쟁 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1월 1일부터 《난중일기》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는 진영과 군대의 상황, 전쟁 업무에 관한 일들이 망라되어 있다. 부득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날을 제외하고는 당시 벌어진 전황을 빠뜨리지 않고 7년간 기록하였다.
2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사신을 보내 "조선 국왕이 입조하거나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고, 마침내 4월 14일 유키나가 부대가 부산포를 침입하여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내륙 진입에 성공하였고, 당황한 원균은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오늘 할 일은 오직 나가서 싸우다가 죽는 것뿐이다. 감히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참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5월 이순신이 출동하여 원균 부대와 함께 옥포(玉浦)에서 왜장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부대의 왜선 26척을 분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 서울은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에게 20일 만에 함락되었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가 북진하여 평양을 함락하고 함경도까지 진군해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전 국토가 유린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세를 만회하는 방법은 오직 왜적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7월 이순신은 양산(梁山) 에서 호남 내륙을 향하기 위해 견내량에 정박해 있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부대의 왜선 59척을 학익진 전법으로 분멸하여 한산도대첩을 이루었다. 그 결과 해상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함으로써 전라도에 진출하려던 왜군을 차단하는데 주력할 수 있었다.
해상 보급로를 차단한 것이 승리 요인
전쟁 중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지속되었으나 1596년 9월,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조선을 재침하기로 결정하고 북상을 계획하였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이순신과 원균을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선조마저 원균을 옹호하고 이순신을 불신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시켜 흉계를 꾸며 권율에게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갈 때 이순신을 보내 잡으라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것이 적의 계략임을 알고 출동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이순신은 왕명거역이라는 죄명으로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잃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마침 정탁이 신구차를 올려 선조의 마음을 바꾸어 간신히 사면되었다.
이순신은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백의종군하는 길에 들었다. 곧장 아산 어라산의 선영으로 달려가 통곡하던 중 얼마 후 여수에서 올라오던 모친의 싸늘한 시신을 아산 해암에서 영접하였다. 장사도 치르지 못하고 출정해야 하는 참담한 상황에서도 그는 국난극복에 대한 강한 염원을 잠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심에는 항상 비통한 심정이 가득하여 이때에는 일기를 제때 쓰지 못하고 나중에 다시 적었다. 그래서 정유년의 일기가 두 권이다.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한 뒤, 이순신은 북상하려는 왜선을 배 13척으로 명량에서 물리쳤다. 전황이 열세인 상황에서 도주하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맹렬한 포격전을 감행한 결과다.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왜군들이 철수하는데 순천 예교(曳橋)에서 유키나가의 구출 작전도 무력하게 만들고 노량에 통하는 수로를 차단하였다. 마지막 조·명 연합작전으로 노량해전에서 왜선 200척을 분멸시키고 그는 최후의 죽음을 맞았다. 죽는 순간에도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고 한 것에서 그의 남다른 소명의식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그의 늘 근신하는 신독(愼獨)의 정신세계에서 정신적 지주가 되었기에, 그의 신필(神筆)은 총탄이 빗발치는 중에도 항상 멈추지 않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