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는 대형 쇼핑센터와 굵직굵직한 회사들이 있는 서울을 대표하는 상권이다. 명동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골목마다 크고 작은 상점들이 밀집해 서울을 찾은 관광객과 오가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연말이면 화려한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와 휘황찬란한 불빛까지 등장해 거리를 장식하는 곳.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풍경들이다.
을지로입구역 5번 출구 인근에 국내 유명 금융회사 본점이 있다.
1908년 식민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일본이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가 있던 자리다. '식산흥업(殖産興業)과 부원 개척(富源開拓)'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운 이 회사는 그러나 헐값에 넘겨받은 토지를 일본인에게 양도하고, 조선의 영세 소작농들에게 고액 소작료를 받는 전형적인 식민지 수탈기관이었다.
1922년 황해도 재령군에 동척이 운영하는 농장이 있었는데, 흉년에도 5할에 달하는 소작료를 강요당하던 농민들이 참다못해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동척과 일본인 지주들은 오히려 이들한테 소작권을 빼앗고 무력으로 탄압해 유혈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투쟁에 앞장섰던 이들은 감옥에 끌려가고, 살 터전을 잃은 농민 대다수는 만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1892년 황해도 재령에서 나고 자란 나석주에게 이 일은 누구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이 세운 양산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투사로 의열단 활동을 해온 그였다. 마침내 1926년, 3·1운동 후 다소 침체해 있던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다시 한 번 민족혼을 깨워야겠다고 판단한 김구 앞에 나석주가 적임자로 나섰다.
찬바람이 몰아치던 1926년 12월 28일 오후, 폭탄 두 개와 권총을 품에 안은 나석주가 동척과 함께 대표적 수탈기관이었던 조선식산은행 건물 안으로 폭탄 하나를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불발했고, 마음이 급해진 나석주는 재빨리 동척으로 향했다.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비롯해 일본인 대여섯 명을 사살한 뒤 남은 폭탄 한 개를 던지고 밖으로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폭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을지로 2가에서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던 나석주가 선택할 길은 많지 않았다. 좁혀오는 포위망 속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차라리 당당한 죽음이었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마지막 외침과 함께 그는 스스로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나이 서른 다섯. 한창 나이인 청년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도, 돌아가고 싶은 고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뒤돌아보지 않은 채 조국의 앞날을 밝힐 하나의 불꽃으로 타오른 그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토록 환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 아닐까.
참고 자료 : 국가보훈처 - 이달의 독립운동가 나석주
http://cafe.naver.com/bohunstar.cafe
독립기념관 《서울 독립운동 사적지》 - 동양척식회사 터
http://sajeok.i815.or.kr/ebook/ebookh01/book.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