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미국 유학을 시작한 후 첫 크리스마스에 학과 친구들이 모두 모여 파티를 했었다. 파티라고 해봐야 바비큐(돼지를 통으로 굽는 것이 아니라 햄버그를 석탄불에 굽는 것)와 옥수수 칩, 각자 가지고 온 음식들을 내놓고 우리나라 어른들(대학을 졸업하면 다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게임’을 하며 놀았다. 그때 1불짜리 지폐에 누군가 볼펜으로 낙서해 둔 게 있어서 유심히 봤는데, 도대체 해석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Martha, Termnites are eating my teeth”라는 글풍선을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입 옆에 그려둔 것이었다. ‘Martha’는 워싱턴의 와이프 이름이고 ‘Termite’는 나무를 갉아먹는 흰 개미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워싱턴의 이를 갉아 먹어? 워싱턴의 의치(義齒)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을 빗댄 아이들의 장난이라는 것이 당시 미국 친구의 설명이었다.
지도자의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한 변수
최근 워싱턴(Washington)을 다녀왔다. 광복 70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성공과 도전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재단이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원래 계획했던 프로그램에는 일제 강제 병합시기 유산에 관한 주제를 포함시켰으나, 총리실 기념사업단에서 우리나라 전체 학술행사를 종합하다 보니 역할 분담이 필요했고 그래서 재단의 학술회의는 미래 희망을 주요 메시지로, 광복 이후에 집중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이렇게 하여 패널구성은 ① 광복과 건국, ② 성공과 도전, ③ 통일과 미래로 조정하였다. 전체적으로 논의는 한미동맹의 출발과 오늘의 과제로 모아졌다. 많은 발표들을 포괄하는 주제는 장차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따라 한국이 앞으로 강대국으로 나아갈 지, 작은 나라에 그칠 지 결정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결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한미동맹 출발 부분에 관해서는 당시의 미미했던 우리 국력에 맞지 않는 이승만의 외교력과 끌려 다니다시피 한 미국의 정책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이승만에 관해 발표한 조지워싱턴 대학 브래진스키(Gregg Brazinsky) 교수는 1948년 건국 이후 1955년까지 이승만은 남한 정부의 형성과 안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강조했다.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은 그의 비전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지원금을 쏟아 부은 워싱턴의 시각보다는 그의 생각이 훨씬 더 많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집권이 민주주의와 인권에는 상당한 결함을 초래하였으나, 일민주의(一民主義) 사상을 반영한 통치는 남한 정부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조지 워싱턴 기념관을 둘러본 소회
학술행사 다음날, 워싱턴 D.C. 인근에 있는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생가를 방문했다. 워싱턴의 업적을 재미있게 잘 기록하고 있는 기념관을 돌아보고 나니 미국은 무척 자랑스러운 대통령을 둔 축복받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전쟁 후 지도자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미국의 미래를 위해 두 번이나 사양했던 이야기, 대규모 농장에서 밀을 탈곡하기 위해 말이 달리면서 밀알을 털어내는 시설을 고안해낸 이야기, 죽음을 앞두고 농장에 있던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켜 준 이야기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보존하고 있었다.
단풍이 짙게 든 산책로를 걸으면서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는 왜 자랑스러운 지도자가 드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불행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우리 지도자를 위대하게 만들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정교과서 논란이 떠올랐다.
워싱턴 기념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시된 워싱턴의 의치였다. 그것도 달랑 하나 놓여있는 게 아니라 당시 의치 기술에 관한 상세한 소개까지 곁들여 거창하게 설명하고 있었는데, 눈에 띄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워싱턴의 의치가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래에 보는 바와 같이 상아나 하마 이빨 등으로 만든 의치나 금으로 된 철사, 청동나사 등으로 엮은 틀니를 썼다.” 워싱턴과 관련된 일화 중 나무 의치 이야기는 벚나무 전설 다음으로 유명한 것이라는데, 우리가 안다고 믿는 지도자의 모습이 늘 실제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연히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