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촬영한 한국전쟁 사진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전쟁 사진의 시각과 사각
문자 기록에서 발견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을 사진 자료에서 확인할 때가 있다. 사진 속 피사체를 응시하는 사진가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진이 보여주는 찰나의 순간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런데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일까?
카메라 뷰파인더에 포착된 현실은 전체 현실 중 일부만 보여준다. 사진에는 사각(死角)이 존재하며, 어떤 현실은 감춰진다. 사진의 시각과 사각은 사진가의 위치에 따라 구조적으로 결정된다. 전쟁사진가의 경우 그 위치는 전선에 의해 제약된다. 아군의 시선은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과 적이 감추려는 것에 가 있고, 적군의 시선도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과 아군이 감추려고 하는 것에 가 있다. 전쟁사진가, 특히 군 사진병이 촬영하는 전쟁사진의 목적은 전쟁이라는 사건의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프로파간다의 재료를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실의 어떤 것은 시각화되는 반면, 다른 어떤 것은 사각화된다. 군 사진병의 사진 활동은 군사작전의 일환이었고 검열체제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생산된 전쟁사진 속에 촬영자도 미처 의식하거나 발견하지 못한 진실의 조각들이 숨겨져 있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꼭 응시하지 않고 사각 처리해야 했던 진실의 조각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진이 재현한 찰나의 장면 안으로 재현된 것이다. 일종의 빈틈인 셈인데 이 빈틈에 역사적 해석을 하고 현재의 생생한 역사들로 만드는 작업은 역사사회학자인 나에게 흥미진진한 일이다.
전쟁 사진의 연구 방법
역사적 해석은 사진 이미지만을 보고 일면적인 시각 분석을 하고 자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전쟁 이미지들이 탈 맥락화된 채 특정 목적과 서사 구성에 일면적으로 사용되거나 심지어 왜곡·오용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전쟁 사진을 연구하는 방법의 확립이 절실하다. 사진 이미지는 누가, 어떤 목적과 의도로, 언제, 어디에서 촬영했는지와 사진들의 2차 사용 맥락과 그 과정에 대한 정보들이 조사되어야 한다. 이런 생산 정보들은 사진 뒷면 캡션이나 별도 캡션지에서 확인할 수 있고, 사진병과 소속 부대의 작전으로서의 사진 활동 관련 각종 보고서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이 있다면, 푸티지영상도 있다. 통상 작전에서는 사진병과 영상카메라 맨이 같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정지사진으로는 알 수 없던 피사체와 이를 둘러싼 맥락들이 푸티지영상으로 생생하게 확인되는 경우가 있다. 다양한 생산 정보 및 관련 문서와 영상 등을 교차 확인하고 사진의 생산 맥락들을 분석하는 것은 전쟁 사진의 시각적 특성과 사각의 내용을 풍부하게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사진1 NARA II 사진실과 영상실(필자 촬영)
한국전쟁 사진의 피사체
한국전쟁 사진의 중심 피사체는 군이다. 미군 및 한국군 장군, 장교, 사병을 다양한 상황에서, 예컨대 기자회견, 작전회의, 전투, 이동, 휴식 등의 상황에서 인물 중심으로 클로즈업했다. 그리고 피사체가 사물인 경우도 많은데, 무기체계, 수송과 보급, 전력·통신·교통·항만 시설, 파괴된 폐허 등을 포착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한국전쟁에서 미군, 유엔군, 한국군을 포착하는 사진들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용맹함을 재현한다. 전쟁 초기 전투와 관련한 사진들의 피사체는 일진일퇴의 총력전(낙동강 방어전선)에서 전쟁 스펙터클의 절정과 승리의 기록(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에 대한 것들이다.
피사체가 적군인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사진은 주로 적의 파괴 행위, 특히 잔학행위의 결과들을 클로즈업하고 이를 전쟁범죄로 연결하는 구도를 취했다. 미군 사진병들은 이를 많이 찍어 시각화했고, 이에 대한 정보 및 내용 캡션을 상세히 달았다.
사진2 손을 뒤로 묶인 채 살해된 미군 포로(출처: NARA II 111-SC 343302)
사진 2는 1950년 7월 10일 댄젤(R. Dangel) 상병이 찍은 사진이다. 7월 9일 밤 정찰 중이던 미 24사단 21연대 병사 4명이 생포된 후 처형된 채 버려진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머리 뒤로 총살되었다. 발견된 장소는 “전방관측소와 전선 사이의 도로”라고 캡션에 나와 있는데, 충남 연기군 전의면과 전동면 부근인 것으로 보인다. 총살된 미군 사진은 7월 12~13일에 걸쳐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그런데 이 사진은 한편으로 적의 잔학행위를 시각화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아군의 죽음을 생생하게 시각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미국인이 받아들일 충격은 실로 심대한 것이었다. 죽음이 반복되고 규모가 커지면 반전 여론이 형성될 수도 있었다. 이후 미군의 죽음을 시각화하는 사진은 더 이상 공개되지 않았다.
아군의 잔학행위 결과들은 미군 사진병의 사진에서 사각화되어 있다. 예컨대 한국군과 경찰에 의한 정치범, 부역자 학살이나 미군에 의한 대민 폭격과 기총소사 등은 사각화되었다. 이 사각이 시각화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로 식별되지 못한 채 ‘적’으로 간주되어 이루어진 파괴와 죽음에 대한 시각에 한해서다.
군 못지않게 많이 등장하는 피사체가 남녀노소의 한국인들이다. 전쟁 초기 미군의 사진 속에서 이들은 대개 피란민들로 포착된다. 그런데 이 한국인들을 담은 사진 속 미군의 시선이 매우 복잡하고 혼동이 있다. 예컨대 피란민의 경우 전쟁을 피해 이동하는 ‘비무장 민간인’이라는 시선과 무장을 은닉한 ‘불순분자’ 또는 ‘공산주의자’라는 시선 사이를 오갔다. 농촌과 산촌 주민들에 대한 시선도 비문명적이고 열악한 일상이라는 인종주의적 시선과 목가적이고 평온한 일상이라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사진 3 대구로 가는 피난길에서 미군과 한국군 헌병에 의해 검문받는 피란민(출처: NARA II 111-SC 346933)
사진 3은 미군 헌병과 한국군 헌병이 함께 대구로 향하는 피란민들을 검문하고 있다. 갓을 쓴 노인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이었음에도, 푸른 눈의 이방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군 헌병이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란 봇짐에 무기를 은닉하고 있지는 않은지 검색하고 있다. 전형적인 남부여대 모습의 피란민 가족이지만 미군은 이들이 ‘불순분자’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시사적인 미군 기록이 있다. 1950년 7월 19일, 25사단 작전 부참모관실은 “적이 여성과 아이를 동반해 아군의 후방을 침투하기 때문에 전투지역에 있는 모든 한국인은 적으로 간주하고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에 25사단장 킨(W. B. Kean) 소장은 전투지역 내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여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시각화된 구원과 사각화된 파괴
한국전쟁 사진에서 가장 강력한 이미지 중 하나는 미군과 유엔의 구원자 이미지다. 공산 악마의 침략을 막아내고 한국을 군사적으로 구원하러 온 십자군 이미지 그리고 한국을 경제적으로 구원하는 인도주의적 구호와 재건 및 경제 원조에 힘쓰는 구세주 이미지가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시각화된 이미지의 실체는 무엇이고, 그 사각은 무엇일까?
현실은 봉합된 이미지보다 더 잔혹하게 나타났다. 적과 우리를 가르는 경계가 톱질전쟁의 전선 상황만큼이나 끊임없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군은 적과 우리의 경계를 재설정해 민간인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권력이 되었다. 그 결과 피란민들에게 미군과 유엔군은 자신들을 ‘우리’로 식별하지 못해 의심하고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압도적 파괴자’인 동시에 부상을 치료해주고 먹을 것을 주며 주거지를 마련해주는 ‘숭고한 구원자’였다.
사진 4 서울 용산 조차장 폭격(김태우, 『폭격』, 창비, 2013, 245쪽)
사진 4는 1950년 7월 16일 용산지역 폭격을 촬영한 것이다. 캡션에 따르면 “공군의 B-29기들이 최근 공중공격에서 한국의 서울지역 조차장을 공격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서울 조차장 폭격은 정밀폭격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B-29기 47대가 작전에 투입되어 총 1,504발의 225kg 파괴폭탄이 용산지역에 투하되었고, 그 결과 조차장 내 철도차량과 철로, 철도공장 등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 정밀폭격조차도 이름과 달리 사진상의 조차장만을 폐허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손정목과 김성칠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인근 용산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당시 공보처 통계국의 수복 직후 서울지역 피해 통계치도 이를 잘 보여준다. 용산구가 전체 사망자 수와 공중폭격으로 인한 사망자 수 부분에서 가장 수치가 컸다. 정책적으로 정밀폭격을 추구했지만, B-29기의 높은 오폭률과 전폭기의 호위사격 등으로 인해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진 5 피란민 여자아이들이 구호물자로 받은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는 유엔민사처 요원
(출처: NARA II 111-SC 421651)
사진 5는 부산의 한 피란민 수용소에서 한 여성(신옥주)이 자신의 딸과 친구에게 옷을 입히고 있고, 이를 유엔민사처(UNCACK)의 한 공중보건 담당관이 도와주고 있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이 옷들은 트럭에 실려 있는 많은 옷 포대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인대한구호단체(ARK)를 통해 미국에서 수집한 것이다. 사진 속 장교는 카메라의 응시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다. 미군 장교와 아이들 피사체의 배경으로 ‘ARK’가 선명하게 찍힌 옷 포대들을 포착해 미군의 인도주의적 구호를 효과적으로 연출한 것이다.
이 글은 정근식·강성현, 『한국전쟁 사진의 역사사회학: 미군 사진부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과 강성현, 『작은 ‘한국전쟁’들: 평화를 위한 비주얼 히스토리』, 푸른역사, 2021을 주로 참조해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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