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성, 무너지다
권순홍 한국항공대 교수
지난 봄, 백암성을 다녀왔다. 몇 번인가 가보았지만, 이번 여행은 내게 특별했다. 요양에서 백암성으로 향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심양공항에 도착한 이후 곧바로 남쪽의 백암성으로 향하는 여행객의 루트가 아닌 고구려의 요동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군대가 동쪽의 백암성으로 진군한 역사적 루트였다.
백암성에서 바라 본 요동성 방면(필자 촬영)
손대음의 항복
645년 음력 6월 1일 무더운 여름 날, 백암성이 항복했다. 고구려 요동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군대가 백암성으로 진군한지 이틀 만이었다. 백암성주 손대음은 요동성을 집어삼킨 거대한 불길을 멀리서 보았을 때 이미 항복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당군의 불공격으로 요동성의 건물은 전부 불탔고, 화마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채 30km도 떨어지지 않은 백암성에서 손대음은 요동성 위 붉게 물든 하늘과 며칠이나 시커멓게 피어오른 구름연기를 틀림없이 보았고, 그는 ‘항복이냐, 항전이냐’를 판단해야 했다. 백암성은 작은 성이었다.
초여름 같던 4월의 아침, 요동성이 있던 요양을 출발하여 동쪽의 백암성으로 향했다. 645년의 당군은 이틀이나 걸린 길을 차로 한 시간만에 내달렸다. 성에 가까워지니 손대음이 항복한 이유를 또 하나 알 수 있었다. 백암성은 규모도 작았지만 성의 구조도 농성에 매우 불리했다.
사료에서는 “사면이 험하고 절벽이어서 공격할 수 있는 곳이 겨우 60보에 불과”했다며, 백암성을 함락시키기 어려운 곳처럼 묘사했지만 실제는 달라 보였다. 문외한도 알 수 있는 군사적 약점이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이다. 성 밖에서 성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치명적 약점이다. 그래서일까, 위 사료를 당의 프로파간다로 이해하기도 한다. 황제가 친히 이곳까지 행차하니 고구려 성주가 항복하고, 이에 황제는 자애롭게도 항복한 자들을 모두 살려주었다는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백암성은 쉽게 함락당하지 않는, 공략하기 어려운 성이어야 했다. 함락시키기 어려울수록 그곳을 힘들이지 않고 항복시킨 황제의 능력과 성과는 부풀려지는 법이니까.
마침 답사한 날이 봄꽃을 구경 나온 사람들이 몰린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성안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더구나 들여다보이는 방향도 요동성 방면이다. 장대에 서서 태자하를 따라 서서히 몰려오는 당군을 바라보던 손대음은 발가벗겨진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항복에는 싸워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반드시 선행한다. 백암성에 와보니 손대음의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요양 방면에서 바라 본 백암성(필자 촬영)
성벽의 붕괴
백암성은 고구려를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였다. 성의 군사적 지위나 역사적 성격과는 무관하게 천년이 넘은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성벽이 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의 북벽은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가 10m(바깥쪽)에 달하고, 고구려 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치(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된 구조물)’가 일정한 간격으로 잘 남아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비탈진 경사면에 수직으로 곧게 서 있는 하얀색의 석성벽은 수많은 자료집과 책, 영상매체에 수록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한계에 다다랐나보다. 성벽이 무너지고 있다. 가장 잘 남아있던 북벽이 무너지고 있다. 성벽 위를 자유롭게 오르내리던 옛 관행은 금지되었다. 곳곳에 설치된 CCTV가 성벽을 감시하고 있고, 성벽을 오르지 말라는 경고방송이 이어졌다. 백암성의 포토 스팟이던 북벽 바깥쪽 비탈길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올랐다. 곧 수풀 사이로 관리 당국이 급한 대로 받쳐 놓은 철제 지지대가 눈에 들어 왔다. 탄식을 금하기 어려웠다. 저 녹슨 철제가 붕괴를 막아줄까. 저 부분만 지지하면 되는 걸까. 안타까움과 궁금증이 교차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백암성 북벽의 2014년 모습(필자 촬영)
백암성 북벽의 2024년 모습(필자 촬영)
최근 몇 년간 부분별로 백암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조사의 영향인지, 아니면 오래도록 관리를 소홀히 했던 탓인지 명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어디 어느 하나 때문이겠나. ‘천년이면 오래 버틴거지’라는 말마따나 영원한 것은 없으므로. 그런데 문제는 북쪽 성벽에만 있지 않았다. 아랑곳 않고 오르지 말라는 성벽에 오르는 관람객도 눈에 띄었지만, 산성의 정상부에 있는 백암성 내성 안에도 문제가 있었다. 내성의 장대와 내성벽을 이루었을 수많은 성돌들이 관람객들의 손으로 옮겨져 수십 개에 달하는 기원돌탑 부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훼손이지만, 이곳만큼은 제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645년 당태종 앞에 무너진 백암성이 지금 다시 무너지고 있다.
백암성의 미래
백암성과 그 주변은 대규모의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성 앞에 게시된 계획대로라면 백암성의 성문이 복원되고, 백암성 전투 기념공원이 조영되며, 당나라 문화 체험구역과 고대 군사 체험구역 등도 조성된다고 한다. 앞으로 백암성이 어떤 공간으로 재구성될지, 그 재구성된 공간에서 어떤 기억이 생산/재생산될지 의문이다. 무너지는 백암성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무력하다. 예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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