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기록’에 삽입된 통신사 삽화
한국과 일본에는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다양한 회화가 현존한다. 통신사가 일본에서 육로를 도보로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통신사행렬도’를 비롯하여, 부산과 오사카 간을 항해하는 선단화(船團畵), 사행원이 남긴 유묵화, 사행원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통신사 관련 회화에는 한 편의 독립된 작품이 아니라 ‘문자 기록’에 삽입된 삽화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도 있다. 이런 부류의 그림은 에도시대 일본에서 작성된 문헌에서 통신사에 관한 정보를 기록하면서, 사행원의 다양한 차림새와 소지품(각종 악기와 도구류)을 함께 그려 넣은 경우이다. 대개는 사행원들의 복장과 도구를 묘사하고 거기에 명칭, 용도, 색깔, 크기 등 간단한 설명을 함께 기입하곤 했다.
다양한 삽화를 남긴 요도 번사 와타나베
통신사 기록물은 일본에서 조선 통교를 전담하던 쓰시마에 의해 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삽화는 쓰시마 종가기록(宗家記錄) 혹은 종가기록을 필사한 타 지역의 문헌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쓰시마가 아닌 지역에서 기록되어 삽화가 풍부하게 게재된 문헌이 존재한다. 그것은 『조선인내빙기(朝鮮人來聘記)』라는 이름으로 에도시대 요도번(淀藩)의 와타나베 가문에 전래되어 온 1748년 통신사 관련 사료이다. 요도번은 교토시 후시미구(伏見區) 요도혼마치(淀本町)에 위치하던 번으로, 1748년 통신사 일행이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번주 이나바 마사요시(稲葉正益)는 소샤반(奏者番)에 지샤부교(寺社奉行)을 겸하는 등 막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다.
와타나베 가문에는 『조선인내빙기』 외에도 『조선인내조행렬도(朝鮮人來朝行列圖)』, 『종대마수행렬도(宗對馬守行列圖)』, 『한인희마도(韓人戲馬圖)』, 『통신사요도성하도착도(通信使淀城下到着圖)』, 『조선인어향응어헌립(朝鮮人御饗應御献立)』이 전래되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통신사 행렬도를 비롯해서 다양한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선인내빙기』를 충실하게 베낀 모사본이 남아 있다는 점도 특이점이다.
이 중 『조선인내빙기』 원본(7권 3책, 각 22×27cm), 『조선인내조행렬도』, 『종대마수행렬도』, 『한인희마도』, 『통신사요도성하도착도』 등 5점은 모두 번사(藩士) 와타나베 젠에몬(渡辺善右衛門)의 작품이다. 그는 1748년 사행 때 요도 성하(城下)에서 통신사 향응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조선인내빙기』의 〈삽화 1〉
(출처: 『(叢書京都の史料11) 淀渡辺家所蔵通信使関係文書』 수록, 교토시 역사자료관 소장)
‘사행의 실상’을 말해주는 시각 자료이자 역사 자료
『조선인내빙기』는 사행단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들을 맞는 요도번의 응접 준비와 그 과정에서 우왕좌왕하는 번사들의 모습을, 와타나베 본인이 목격한 사실에 소문 등을 섞어서 기록한 것이다. 제1책은 1746년 12월 번내(藩內)에서 통신사 접대 담당으로 임명된 시점부터 적기 시작해서, 제2책은 사행단의 요도번 도착, 제3책은 통신사가 귀국길에 요도에서 휴식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때 저자가 관찰한 통신사 일행의 풍습, 의상, 기물 등의 모습을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삽화로 묘사해 두었다.
『조선인내빙기』 삽화의 특징은 묘사한 대상의 조선식 명칭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점이다. 크기와 형태, 용도를 중점적으로 설명하면서 기구의 용도를 마치 명칭처럼 써넣거나 혹은 일본에서 사용되던 유사한 도구의 명칭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예를 들면 삼사의 밥상을 ‘산시노젠(三使の膳)’, 곤장을 ‘세이바이보(成敗棒)’, 밥그릇을 ‘쇼쿠완사하리(食椀さはり)’라고 하는 식이다. 와타나베는 대상의 조선식 명칭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사행단을 관람하는 입장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기 쉬웠을 크고 화려한 기구, 예를 들면 청도기를 위시한 깃발, 교자(轎子), 국서함을 태운 가마 등은 아예 기록하지 않았다. 물론 조선인의 의복, 머리에 착용한 관(冠), 태도(太刀), 갖가지 악기, 개(蓋, 양산 모양의 의장[儀仗]) 등 조선인의 외관에서 눈에 뜨이는 이국적인 부분과 조선인이 소지한 도구들을 다양하게 수록하고 있지만, 악기와 개(蓋)를 제외하면 나머지 물건들은 의장과 상관없이 몸에 지니는 일상적인 소지품이나 기호품이 대부분이다.
그림체는 소박하며 그림 하나하나가 간결하면서도 사물의 특징을 잘 집어서 표현했다. 일본에서 작성된 통신사 관련 회화는 대부분 사행단이 행렬을 지어 이동하는 모습, 에도성에서 전명식(傳命式)을 치르기 위해 정렬한 모습, 필담창화(筆談唱和)를 나누었을 때의 인물화가 일반적이다. 결국 사행단의 모습을 담은 회화의 대부분은 일본인 관람객이 있을 때의 ‘의장을 갖춘 모습’인 셈이다. 현전하는 통신사 행렬도의 상당수가 그렇다.
하지만 『조선인내빙기』의 삽화는 사행단의 구성원들을 훨씬 더 근접 거리에서 관찰해야만 묘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의복을 그린 삽화만 보아도 겉옷뿐 아니라 겉옷 아래 공통적으로 입는 옷과 함께 그것을 입는 방법을 소개했고, 관(冠)을 그리면서도 관 아래의 헤어스타일, 상투 튼 머리 모양에 주목했다.
『조선인내빙기』의 〈삽화 2〉
(출처: 『(叢書京都の史料11) 淀渡辺家所蔵通信使関係文書』 수록, 교토시 역사자료관 소장)
저자 와타나베는 요도번의 통신사 향응을 담당한 인물로 사행단원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겠지만, 식사하고 휴식하는 자리에서 조선인이 보여주는 모습과 그들이 일상적으로 소지한 물건들을 세세하게 관찰한 듯하다. 의장과는 거리가 먼 생활용품들 이를테면 밥그릇, 밥뚜껑, 담뱃대(キセル), 접는 손부채(扇子), 되(升), 솥(鐵釜), 밥상(食膳) 심지어 곡식을 까불러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 사용하던 키(箕[み])를 묘사했다. 그의 기록물이 공적으로 활용되었는지 그저 개인 취미의 소장에 머물렀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통신사 사행단의 ‘의장 해제 시의 모습’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의 삽화는 여타 조선통신사 관련 삽화와는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
‘의장 해제 시 사행단의 사용 기물’에서는 ‘통신사행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삽화3〉에서 소개한 밥그릇, 되, 솥, 밥상, 키 등은 명백하게 ‘곡물에서 불순물을 골라내어 음식을 지어 먹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이다. 일반적으로 통신사 일행은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본 곳곳에서 음식을 제공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상부의 일부 인원은 요리된 음식을 제공받기도 했지만 사행단이 이런 물건들을 챙겨서 일본에 가져갔다는 것은 해당 도구를 사용해서 직접 취사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사행단원에 숙수(요리사) 1명·도척(刀尺, 음식 만드는 노복) 7명·도우장(屠牛匠, 우마를 도살) 1명이 포함되어 있던 점을 상기하면 요리에 필요한 도구를 지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이처럼 통신사 기록에 보이는 삽화는 때로 공식적인 기록화에 묘사되지 않는 ‘통신사행의 실상’을 말해주는 시각 자료이자 역사 자료의 의미를 지닌다.
『조선인내빙기』의 〈삽화 3〉
(출처: 『(叢書京都の史料11) 淀渡辺家所蔵通信使関係文書』 수록, 교토시 역사자료관 소장)
통신사 기록에 삽화를 남긴 이유
와타나베 젠에몬이 그린 『조선인내조행렬도』도 일반적인 통신사 행렬도에 묘사되지 않은 ‘실상’을 전해준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다. 『조선인내조행렬도』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행렬 중간중간에 ‘○○樣鞍皆具(○○님 안장 모두 구비함)’라는 식으로, 검은 글자가 쓰인 깃발을 든 일본인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선통신사의 이동에 사용되는 말과 마구류는 막부의 명에 의해 각 다이묘들이 부담하게 되어 있는데 와타나베는 실제로 말과 마구류를 제공한 주체를 적은 깃발과 이것을 들고 통신사 일행과 함께 이동하는 관리들의 모습을 행렬도에 그려 넣었다. 다른 행렬도에서 해당 관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화가들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생략했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와타나베의 행렬도가 오히려 현실의 통신사 행렬을 충실히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공교롭게도 삽화가 게재된 일본의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전부 18세기에 작성되었다. 적어도 17세기 중반까지 쓰시마가 기록한 문헌에서는 이런 삽화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기록물에 삽화를 삽입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향후의 과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