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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호 뉴스레터
COVER STORY 훈련을 놀이처럼, 놀이도 훈련처럼
훈련을 놀이처럼, 놀이도 훈련처럼▲ 표지 그림 : 덕흥리 고분벽화의 마사희평안남도 덕흥리 고분벽화의 널방 서벽 왼쪽 상단에 그려진 마사희(馬射戱 : 말을 타고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는 놀이) 모습이다. 그림 오른편에 ‘서원마사희(西園馬射戱)’라 쓰인 글로 미루어 서쪽 뜰에서 벌어지는 마사희 장면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총 일곱 명인데 말을 탄 네 사람은 선수고, 나머지 서 있는 세 사람은 심판으로 추정된다. 총 다섯 개 장대 위에 과녁을 놓고, 아래쪽 두 사람은 말을 달려 활을 쏘고 있으며, 위쪽 두 사람은 시합을 준비 중이거나 끝낸 것으로 보인다.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머리에 검정색 건(巾 : 천으로 머리를 감싸 뒤로 묶는 모자의 일종)을 두르고, 소매가 좁은 저고리와 통이 좁은 바지를 입은 뒤 허리에 띠를 묶어 활동성을 높였다. 심판관 셋 중 맨 왼쪽 사람은 선수들의 점수를 기록하는 모습이고, 마사희 선수 중 왼쪽 하단 기마인물은 과녁을 지나쳐 몸을 돌린 상태로 활을 쏘는 파르티안 사법(射法)을 구사하는데, 함께 고개를 돌린 말의 모습까지 재미있게 묘사하여 그렸다.몸집이 작아 산악 지형 전투에 유리했을 말을 타고 평소에도 마사희나 수렵활동으로 활쏘기를 익혔던 고구려 기마무사들의 역동적인 기개가 느껴지는 장면이다.자료 참고 : 동북아역사넷
광복 70주년, 동아시아 인권보호체계를 만들자
기고 광복 70주년, 동아시아 인권보호체계를 만들자 2015년 8월은 제2차 세계대전이 아시아에서 끝난 지 70주년을 맞는다. 인류는 지난날의 과오를 통해 인간이 살아갈 만한 새로운 세상을 향해 새 역사를 열어왔다. 아시아보다 석 달 남짓 먼저 종전한 유럽에서는 전쟁의 재발을 막고, 역사적 도약을 위해 공동의 가치에 따른 새로운 공동체들을 만들었다. 이 공동체들 중에서 유럽인권체계는 인류가 만든 그 어떤 제도적 장치들보다 의의가 있다.당시 서유럽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나라들이 자국민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인권을 존중하는 정부를 만들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호전적인 독일과 연합국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국가들이 공동의 가치에 따라 지역통합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1949년 유럽심의회(Council of Europe)와 1952년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를 각각 탄생시켰고, 1950년 유럽인권협약을 채택한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는 어떠한가?아시아 근·현대 역사에서도 대규모 조직적 인권침해 사례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저질렀던 잔혹한 인명살상은 세계사에 크게 부각되어 있지 못하다. 제1차 세계대전 개전과 함께 신생 터키 정부가 저지른 최소한 80만~100만 명의 아르메니아 민족 집단학살, 1937년에 일본 군국주의 정부가 저지른 남경대학살(우 테인 웨이 미국 일리노이대 명예교수가 계산한 최소 34만 명~중국 측 매장기록에 나타난 22만 7천 4백 명과 오타 하사오 일본 육군 소령의 고백서에 보이는 15만 명을 합산하여 최대 37만 7천 4백 명) 등은 아시아에 인권보호제도를 만드는 데 활용되지 못했다.냉전에 묻힌 아시아 근·현대사의 인권침해 문제오늘날 아베 정부가 역사를 부정하고, 심지어 날조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일제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은 국가들의 목소리가 동서냉전 상황에 묻혀버렸고, 제2차 세계대전이 동아시아 피해국
글 허만호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상호 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새로운 한일 미래가 열린다"
인터뷰 "상호 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새로운 한일 미래가 열린다" 재단은 지난 6월 17~19일까지 제주도에서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등과 함께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국제학술행사’를 개최했다.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는 20세기 전반의 식민통치 시대와 해방 후 단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양국관계의 출발을 의미하는 일이었으며, 2015년은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재단의 조윤수 연구위원은 이번 행사에 참여한 기미야 다다시 교수를 만나 한일관계의 현재를 진단하고 향후 관계 발전방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_ 편집자 주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교수1960년 시즈오카(靜岡)현에서 출생했다. 1983년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 후, 1993년 동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2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밖에 현대한국연구센터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 전문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조윤수 1980년대 한국에서 유학을 하셨는데 당시 한국 연구를 하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였다. 한국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기미야 다다시 처음부터 한국이라는 나라나 한일관계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동세대 한국연구자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원래 관심은 주변부에서 바라본 국제정치 문제였다. 그중 한 방법으로 제3세계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사례 연구로 한국의 박정희 정권에 관심이 생겼다. 한국과 같은 발전도상국이 자본주의 세계 경제체제에서 경제발전을 추진할 때 어떠한 제약을 받았는지, 또 어떠한 기회를 부여 받았는지, 그런 기회와 제약에 대응하기 위해 어떤 국내 정치경제체제를 구축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한국 연구라기보다는 보편적인 국제정치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조윤수 일본 내에서 한국 사회에 정통한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한국 연구를 하면서 느낀 학문적 보람은 무엇인가?기미야 다다시 첫 번째 질문과 연관지어 말하면 한국을 연구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사 연
인터뷰·진행 조윤수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한일협정 50년사의 재조명 국제학술회의 한일협정 50년, 동북아 평화공동체 구축으로 나아가는 길
연구소 소식 한일협정 50년사의 재조명 국제학술회의 한일협정 50년, 동북아 평화공동체 구축으로 나아가는 길 지난 6월 22∼23일, “한일협정 50년의 성찰과 평화공동체의 모색”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재단은 20 11년부터 2014년까지 일본군‘위안부’ 및 일제강제징용 피해 등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 및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에 대한 ‘식민지’ 책임과 한일협정체제를 재조명하고, 2011년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2012년 대법원 판결의 향후 과제에 대해 검토해 왔다.올해로 5년차인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한일협정 체결 50주년을 맞아 지난 4년간 규명해 온 역사적 진실과 국제법적 정의의 토대 위에서 “한일협정 50년의 성찰과 평화공동체의 모색”에 관한 종합적 검토와 방향성 제시가 긴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기획되었다. 회의는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한일협정 체결 50년의 성찰, 국제법학에서 본 일제 식민지 책임, 한일협정체제와 남겨진 과제, 한일협정의 현재와 평화공동체의 미래, 동북아평화공동체의 모색과 전망 등 5개의 세션과 종합토론으로 나눠 이틀간 열렸다.일제 식민지배·침략을 체험한 양국 원로의 기조강연지익표 대일민간법률구조회 초대회장과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스루가다이대 명예교수는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직접 체험한 양국의 원로 법률가이자 역사학자다. 양국의 원로는 6월 22~23일 이틀 간 각각 한일협정 50년의 성찰과 평화공동체의 과제에 대한 기조강연으로 회의의 문을 열었다.이어서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세계 역사학자들의 공동성명을 주도한 알렉시스 더든(Alexis Dudden)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는 ‘일본의 식민책임 그리고 역사와 법에 있어서의 ‘위안부’ 문제’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일본은 극악무도한 인권 범죄에 대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한일협정 50년의 성찰과 양국 사법판결의 과제’를 주제로 일제 식민피해자의 구제를 위한 한국 사법부의 판결과 국제적인 경향을 조명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로서 인권존중을 전제로 하는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 정립을
글 도시환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영국 셰필드 역사영상 심포지엄 영국인에게 찾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
연구소 소식 영국 셰필드 역사영상 심포지엄 영국인에게 찾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 재단은 영화를 통해 한일간 역사 문제를 짚고 상호 이해를 돕고자 역사영상 심포지엄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 6월 19~20일에는 영국에서 “일본군‘위안부’, 그들의 목소리를 듣다(Comfort Women, Listening To Their Voices)”라는 주제로 ‘위안부’ 소재 다큐멘터리 영화 4편을 상영한 뒤, 감독 및 전문가와 대담을 진행하였다. 행사가 개최된 영국 셰필드 쇼룸워크스테이션 이안 와일드 CEO의 리뷰를 통해 이틀간 누적관객 약 150명이 찾은 이번 상영회를 돌아본다. _ 편집자 주▲ 릿쿄대학 이향진 교수와 개회사를 하는 이안 와일드 쇼룸 CEO셰필드는 과거 철강산업과 중공업이 발달했던 영국 북부의 공업 도시다. 1980년대 제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바이오산업과 의학산업, 창의디지털산업으로 경제를 재건하여 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영화적 측면에서는 대표적인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Doc Fest)’과 런던을 제외한 가장 큰 독립영화제작사 왈프 필름(Warp Films)의 고향이기도 하다.한국 영화와 오랜 인연을 지닌 셰필드 쇼룸워크스테이션이번 동북아역사재단의 일본군‘위안부’ 소재 영화가 상영된 곳은 창의디지털산업을 위한 셰필드미디어센터에 소속된 쇼룸워크스테이션(이하 ‘쇼룸’)이다. 쇼룸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으며 4개의 상영관과 카페 겸 바를 갖추고 있는데, 정부 등에서 받는 보조금은 전체 운영비의 약 5%에 불과하고 대부분 대관이나 카페 겸 바의 영업 수익을 통해 운영된다.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은 쇼룸은 새로운 영화 관객을 창출하려는 정부 계획인 ‘필름 허브 노스(Film Hub North)’를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쇼룸에서는 다양성과 관객의 선택을 향상시키기 위한 스크린 정책을 운영하고 있다. 매달 30~35편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주로 영국의 독립영화나 해외 영화들이다. 고전 영화나 다큐멘터리도 상설 프로그램의 일부를 이룬다. 극장에서는 청년과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제작 수업과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글 이안 와일드(Ian Wild, 쇼룸워크스테이션 CEO)
위기에서 빛난 을지문덕(乙支文德)의 리더십
역사인물 위기에서 빛난 을지문덕(乙支文德)의 리더십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고구려가 상대방의 허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는 전략을 수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을지문덕이 태어난 6세기 중후반, 고구려는 안팎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고구려는 5세기 이래 독자세력권을 구축하며 동북아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그런데 6세기 중반 잇따른 왕위 계승전으로 극심한 내분에 빠졌다. 이를 틈타 나제동맹군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자 고구려가 주도하던 삼국의 역관계도 새롭게 변모하였다. 북방 초원에서도 돌궐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여 고구려를 위협하였다.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서곡에 불과하였다. 589년 수(隋)가 300여 년간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을 재통일함에 따라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수는 주변국에게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고구려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쉽게 결정하기 힘든 문제였다. 수의 강요를 받아들일 경우 그동안 구축했던 독자세력권은 물론, 주변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도 포기해야 했다. 자칫하면 국가의 명운이 다할 수도 있었다.오랜 고심 끝에 고구려는 종전의 독자세력권을 회복하여 수에 맞서기로 하였다.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귀족세력들은 수라는 강대한 적을 앞두고 일시 단결하였다. 녹슬었던 병장기를 수리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한편, 각지의 성곽을 수리하여 물샐틈없는 성(城) 방어체계를 재구축하였다.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한강유역 회복에 나서는 한편, 북방의 말갈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바다 건너 왜에도 선진 문물을 전수하며 밀접한 외교관계를 가졌다.우중문에게 보낸 시는 탁월한 전략가의 심리전612년, 마침내 수 양제가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수군을 맞은 것은 인기척 하나 없는 허허벌판과 철벽같은 성곽이었다. 평원전에 익숙한 수군은 당황하였다. 요동성을 3개월이나 공격하였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대군을 거느리고 어디든 정복하리라 생각했던 수 양제는 조급해졌다. 당시 수군의 최대 약점은 수천 리나 되는 긴 병
글 여호규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한평생 프랑스에 한국을 널리 알린 학자
기고 한평생 프랑스에 한국을 널리 알린 학자 지난 6월 11일, 이진명 프랑스 리옹3대학(Université de Lyon) 명예교수가 평생 프랑스에서 한국학을 연구하고 가르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교육 공로 훈장인 ‘슈발리에 훈장(Chevalier dans l'Ordre des Palmes académiques)’을 받았다. 이에 이진명 교수의 학술 활동과 생애를 정리하여 싣는다. _ 편집자 주슈발리에 훈장은 프랑스 정부가 예술·문학·교육 분야의 발전에 기여하거나 문화 보급에 공헌한 인사들에게 주는 상이다. 이 훈장은 일찍이 불어권 한국학의 개척자였던 고(故) 이옥 교수(1928~2001, 한국 고대사 전문가이자, 재불 한국학의 효시. 그의 부친 이인은 일제강점기에 변호사와 항일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 초대 한국 정부의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가 1996년 수상하였으며, 이후 이진명 교수가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이진명 교수는 1946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으며, 경희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 껑(Caen) 대학에서 역사학으로 학사와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1977년 파리4대학(Université Paris-Sorbonne)에서 ‘프랑스와 일본의 경제교류사(Les relations économiques et financières entre la France et le Japon, de 1859 à 1914)’에 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이진명 교수는 1983년부터 2012년 정년퇴임하기까지 29년간 리옹3대학(Jean Moulin)에 봉직했는데, 5년간은 강사(1983~ 1988), 13년간은 부교수(1988~2001), 그리고 11년간은 정교수(2001~2012) 신분으로 일하였다. 2000년에는 프랑스 최고의 국가 학위인 HDR(Habilitation à diriger des recherches : 박사논문 지도 및 정교수가 될 수 있는 자격)를 취득하였다.
글 이상균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정미의병 발원지 터 정미의병, 구국 항일투쟁의 새 도화선
현장보고 정미의병 발원지 터 정미의병, 구국 항일투쟁의 새 도화선 ▲ 시위보병연대 장교들 (사진 : 독립기념관 제공)1907년 대한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뒤, 정미7조약까지 강제 체결하였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법령제정권과 관리임명권, 행정권 등 대다수의 국권을 일본 통감에 넘기는 것이었다.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된 후, 후속 조치로 대한제국 군대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8월 1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이병무가 시위대 여단장 양성환 참장 이하 연대장과 대대장 등을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관저로 소집하여 해산 계획을 발표하였다. 오전 10시 훈련원에서 해산식을 거행하겠다는 명령까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박승환 대대장이 소식을 전해들은 당시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한 끝에 권총을 꺼내 자결했다. 그의 품에서 나온 유서에는 당시의 비분강개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오전 8시,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 소식을 들은 대원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탄약과 무기를 탈취해 저항에 나섰다. 곧 인근의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까지 동참하여 총 700여 명의 한국군이 서소문과 숭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탄약과 무기는 물론 수적으로도 열세였던 저항군은 약 2시간여 의 전투 끝에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남긴 채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비록 이날 전투에서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이후 해산당한 군인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의병에 참여, 항일 무장투쟁의 병력과 전술을 크게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죽더라도 나라를 위해 한 번 싸워보겠다고 외치던 그들에게 진정 조국(祖國)이란 어떤 의미였던 것일까. 지금도 남대문 앞 서울상공회의소 뒤편에는 이날의 전투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정미의병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현장보고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지난 2011년 8월 2일~6일까지 국가보훈처 보훈교육연구원 주최로 국외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전해 여름방학 때 보훈교육연구원에서 나라사랑 선양 연수를 받았는데, 성적이 우수한 교사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극동지역과 중국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답사 일정은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공항에 도착한 뒤 최재형 선생의 옛집과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 등을 보고 다시 중국으로 이동, 안중근 의사 단지 동맹비와 청산리대첩 기념비, 백두산 천지, 봉오동 전투 승전지 등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었다.그중 안중근 의사 의거지인 하얼빈 역은 안타깝게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역 건물과 기차가 정차하는 곳만 보았다. 대신 하얼빈 조린공원 내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친필 유묵비 ‘청초당’ 앞에서 그분의 업적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청초당(靑草塘)은 안중근 의사(1879~1910)가 1910년 2월 14일 만주 여순 감옥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동년 3월 26일 순국하기까지 남긴 묵서 중 하나다. ‘푸른 풀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독립한 조국의 밝은 미래를 담아 쓰신 글로 추정된다.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유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고 한 안 의사. 그 분의 조국 독립을 향한 비장한 각오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승고한 애국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짧은 기간 국외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을 통해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부강한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그분들의 후손으로서, 나도 그분들께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마음으로 다음 세대 교육에 헌신하리라 다짐했다.
글. 조원표 (경기 부천시 원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