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고구려가 상대방의 허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는 전략을 수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을지문덕이 태어난 6세기 중후반, 고구려는 안팎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고구려는 5세기 이래 독자세력권을 구축하며 동북아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그런데 6세기 중반 잇따른 왕위 계승전으로 극심한 내분에 빠졌다. 이를 틈타 나제동맹군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자 고구려가 주도하던 삼국의 역관계도 새롭게 변모하였다. 북방 초원에서도 돌궐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여 고구려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서곡에 불과하였다. 589년 수(隋)가 300여 년간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을 재통일함에 따라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수는 주변국에게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고구려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쉽게 결정하기 힘든 문제였다. 수의 강요를 받아들일 경우 그동안 구축했던 독자세력권은 물론, 주변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도 포기해야 했다. 자칫하면 국가의 명운이 다할 수도 있었다.
오랜 고심 끝에 고구려는 종전의 독자세력권을 회복하여 수에 맞서기로 하였다.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귀족세력들은 수라는 강대한 적을 앞두고 일시 단결하였다. 녹슬었던 병장기를 수리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한편, 각지의 성곽을 수리하여 물샐틈없는 성(城) 방어체계를 재구축하였다.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한강유역 회복에 나서는 한편, 북방의 말갈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바다 건너 왜에도 선진 문물을 전수하며 밀접한 외교관계를 가졌다.
우중문에게 보낸 시는 탁월한 전략가의 심리전
612년, 마침내 수 양제가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수군을 맞은 것은 인기척 하나 없는 허허벌판과 철벽같은 성곽이었다. 평원전에 익숙한 수군은 당황하였다. 요동성을 3개월이나 공격하였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대군을 거느리고 어디든 정복하리라 생각했던 수 양제는 조급해졌다. 당시 수군의 최대 약점은 수천 리나 되는 긴 병참선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물샐틈없는 성 방어체계를 바탕으로 들판에 곡식 한 톨 남기지 않는 청야수성전(淸野守城戰)을 구사하였다. 다급해진 수 양제는 평양성으로 곧장 진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수의 30만 별동대가 압록강에 이르자, 을지문덕은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거짓 항복하여 수군 진영 깊숙이 들어갔다. 당시 수의 병사들은 3석이나 되는 무기와 식량을 지급받았는데, 오랜 행군과 전투로 지치자 엄한 군령에도 몰래 식량을 버렸다. 을지문덕은 적의 병사들이 지쳐 있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챘다.
적군의 실상을 파악한 을지문덕은 수 진영을 벗어나 평양성으로 향하였다. 수군이 추격하자 을지문덕은 그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기 위해 싸우는 척하며 도망갔다. 하루에도 일곱 번씩이나 승리를 거둔 수군은 계속 남으로 진군하였다. 이제 평양성 공격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양성은 철옹성이었다. 더구나 수군은 도중에 있는 고구려 성을 하나도 점령하지 못해, 마치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였다. 이 때 을지문덕이 수군 총사령관 우중문에게 시 한 편을 보냈다.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원리에 통달하였고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꿰뚫었으며
전쟁에서 공 또한 이미 높으니 족한 줄 알고 그만 둠이 어떠한가
이 시는 문학적으로도 뛰어나 을지문덕이 문무를 겸비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특히 승리를 그 정도 맛보았으면 물러가는 것이 어떠냐는 조롱에는 심리전까지 활용한 탁월한 전략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을지문덕은 '당신들이 물러나면 우리 왕이 당신네 황제를 찾아뵙겠다'고 퇴각 명분까지 제공하였다. 그렇지만 퇴각하는 수군을 기다린 것은 고구려의 항복이 아니라 거센 추격이었다. 살수[청천강]에 이른 수군이 허겁지겁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고구려군의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이 때 살아서 돌아간 자는 30만 가운데 2,700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수의 대외정책을 정확히 간파하고, 종전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세력권을 회복하여 수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강경책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 성 방어체계를 재구축하고, 수군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한 전략을 수립하였다. 실제 고구려는 이를 바탕으로 네 차례에 걸친 수의 침공을 물리쳤다.
용기와 헌신을 실천한 진정한 지도자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고구려가 상대방의 허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는 전략을 수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을지문덕의 뛰어난 지략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는 작전수립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사지(死地)에 직접 뛰어들었다. 을지문덕의 행동은 구성원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지도자의 용기와 희생정신만이 진정한 리더십의 원천임을 잘 보여준다. 최근 잇따라 국가적 재난을 겪은 우리로서는 곰곰이 되씹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이렇게 고구려는 수의 침공을 방어하는데 성공했지만,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 고구려가 수에 맞설 필요조건을 갖추었지만, 새로운 국제정세의 파고를 뛰어넘을 충분조건까지 마련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사실 수의 중국 대륙 재통일로 촉발된 당시의 국제정세는 종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독자세력권을 구축했던 종전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수·당에 맞서는 대외정책을 수립했다. 이에 고구려는 수·당이라는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남쪽의 신라나 백제와도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는 치명적 실수를 범하게 된다.
결국 고구려는 살수대첩 등에서 수와 당을 물리쳤지만, 종전의 역사적 경험에 갇혀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할 대외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냉전체제 해체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며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종전의 냉전적 인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대외인식이 요구된다. 오늘날 우리의 국가 지도자들에게 구성원을 위해 헌신할 희생정신과 더불어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험난한 파고를 극복할 새로운 대외인식까지 요구하는 것은 과연 무리일까?